BB-7나타난 그림자
오랜 준비 끝에 테레시스는 드디어 런디니움으로 출발하게 되고, 이를 막으려던 아스카론은 결국 실패하고 만다. 한편, 테레시아는 여전히 바벨의 미래를 굳게 믿고 있다.
등장 오퍼레이터: 아스카론
1094년 초
카즈델 지역, 카즈델 이동도시
기다려 주십시오 장군님!
진정해라.
하지만! 그 공작의 사자는 거의 침을 뱉을……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걸 얻지 않았나?
공업 구역의 사용권과 국경 통행권은 확실히 얻었습니다만…… 꼭 그렇게 굴욕적으로 해야 했습니까?
빅토리아의 공작은 장군님을 쥐락펴락했고, 살카즈를 말 잘 듣는 짐승으로 여겼습니다. 내전에서 고개를 든 전사들이 기다린 건 오늘이 아닙니다, 장군님!
그게 바로 우리가 원하는 것 아닌가?
설마 빅토리아가 처음부터 살카즈를 최대의 적으로 삼아 일치단결하여 우릴 상대하길 바라고 있었나?
그것 또한 장군님의…… 물론 적에게 약하게 보여야 할 필요가 있단 건 잘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이건 영광스러운 게 아니라는 생각을……
내가 그들에게 약속한 게 영광이었나?
빅토리아인들이 바라보는 살카즈는, 영광스럽나?
맨프레드, 요즘 경솔한 것 같군.
……
……존엄은 중요한 것이다. 맨프레드.
넌 전사들의 편을 들어주고, 그것 때문에 널 존경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평소 같으면 아마 널 칭찬했겠지.
하지만 우리가 하고 있는 건 무엇이지? 우린 한 나라의 심장을 훔쳐낼 준비를 하고 있다.
이 대지에서 가장 강한 제국을 와해시키고 있단 말이다.
그들의 간극은 그들을 취약하게 만들지만, 살카즈는 지금 굶주리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코 '영광'이나 '존경'이 아니다.
……잘 알겠습니다.
군대의 준비 상황은 어떻지?
준비는 마쳤고, 출발 대기 중입니다. 먼저 간 동포들이 런디니움에서 우릴 맞이할 겁니다.
캐번디시 공작이 요구했던 도착 기한이 머지않았습니다. 지금 저희는 언제든 출발할 수 있습니다.
알겠다.
출발하자. 빅토리아를 궤멸시키러.
아직도 경비를 서고 있나?
그렇습니다.
……
일단 물러나라. 잠시 혼자 있고 싶군.
알겠습니다.
……
근위병이 물러나자, 맨프레드는 한쪽에 놔두었던 술잔을 꺼냈다.
한잔하겠나?
원래 술 안 마셨잖아.
지금도 안 마셔.
그런데, 장군님께선 내게 빅토리아인의 '예의'를 배우고, 다음 임무를 준비하라 명령하셨다.
귀족들은 한 끼를 먹어도 여러 종류의 술을 곁들이고, 술마다 다른 잔으로 마신다는 걸 이제야 알았지.
기억나나? 어렸을 적 장군님은 우릴 데리고 옛 전장에서 검술 훈련을 시켰고…… 밤이 돼서 날씨가 추워지니까 장군님께서 수프를 끓여주셨는데, 수프를 담을 그릇이 없었지.
근데 전장에는 사방에 포탄 껍데기가 널려 있으니까, 네가 그걸 잘라 잔 네 개로 만들었고.
너, 나, 장군님과 전하도 함께, 탄피로 만든 잔을 들고 모닥불 앞에 둘러앉았어.
기억나. 엄청 조용한 밤이었지.
지금처럼 말이지.
겨울의 차가운 달빛이 창문으로 들어왔다. 맨프레드는 손으로 칼자루를 잡았지만, 그조차 차가웠다.
공기는 한없이 조용해졌다.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너흰 내일 런디니움으로 가는 건가.
알아. 네가 장군님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거.
……
넌 아마 못 만났겠지. 그렇지 않았다면 날 찾아오진 않았을 테니까.
내가 포기한 거야.
멀리서 그 사람을 본 순간, 머릿속엔 온통 죽여야겠단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
그래도 조금은 이성이란 게 남아 있었던 걸 다행으로 생각해.
그래서, 지금 날 찾아온 건가?
검술 실력이 많이 늘었다며. 간만에 솜씨 한번 볼까.
난 한 번도 널 못 이겼었지.
아직 쓰러지지도 않았는데 벌써 봐달라고 하진 말라고.
……
전에 테레시아 전하의 서재에서 싸웠던 적이 있었지.
벽 한쪽의 책이 전부 쏟아졌고, 장군님은 우리의 무기를 가져가셨지. 그리곤 30분 안에 서재를 원상복구 하라고 시키셨고.
네가 일부러 두 전하의 주의를 끌려고 그랬단 거, 나 알고 있었어.
그래?
아스카론의 몸이 일그러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순간, 맨프레드는 자신의 목덜미에 차가운 무언가가 스치는 걸 느꼈다.
그는 검을 뽑아 저항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저항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너무 피곤했던 걸까?
내가 여기서 네 목을 베면, 적어도 런디니움에서 죽진 않아도 되겠네. 시체는 용광로에 던져줄게.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이국땅의 전장에서 죽을 필요가 없어져.
그렇게 마음먹었다면 바로 날 죽였어야지. 이게 네 마지막 기회야.
……
결정했구나.
장군님께선 넌 신념이 부족하다 했었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누군가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을 땐, 그렇게 말이 많으면 안 되지.
최근에야 알게 됐지, 난 너보다 신념이 확고하지 않아.
우린 모두 보이지 않는 파도에 떠밀려 이 지경까지 온 거다…… 그런데 전쟁이 시작되던 그날부터, 우린 물러설 곳이 없었지.
……
그럼…… 살 수 있는 만큼 살아보던가.
다음엔, 진짜로 베겠어.
자객은 아무런 말 없이 암살검을 거두곤 서서히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나도.
그래도, 우리가 만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네.
카즈델 지역, 바벨 로도스 아일랜드 본함
한줄기 찬바람이 늦겨울의 두꺼운 구름을 흐트러뜨렸고, 갈라진 틈 사이로 햇빛이 들어와 함교 위를 수놓았다.
계단 아래, 아스카론은 난간 옆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고, 햇빛이 주는 잠깐의 따스함을 느꼈다.
계단 위에서 천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지나가는 사람의 그림자가 자객의 얼굴을 스쳐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빛을 가렸다.
미안해, 쉬는 중인데 방해한 거야? 아스카론.
신발을 벗고 걸으면 소리가 안 날 줄 알았는데.
아니. 언제 와도 방해될 건 전혀 없어.
바닥은 차가워, 신발 신어.
나랑 얘기하기 싫어? 아스카론.
무슨 얘기?
네가 카즈델에 돌아갔던 일 말이야.
……그건 내가 멋대로 내린 결정이야.
전하라면 허락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고,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몰라서……
그렇지 않아, 아스카론. 네가 결정하는 거라면, 나도 네 판단을 믿어.
혹시, 그 사람들도 만났어?
……장군과 맨프레드는 모두 잘 지내고 있어.
난 믿어. 둘 다 강한 사람들이니까.
우리도 준비해야겠네, 카즈델을 되찾는 작전까지 얼마 안 남았어.
……
왜 그렇게 얼굴이 굳어 있어?
최근 작전 계획은 모두 과격했고, 전장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어……
근데 뭔가 불안해.
바벨은 많이 변했어, 특히……
응?
박사.
박사가 많이 변했어,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더 효율적으로 변했고, 더 냉정해졌어. 마치…… 실수가 없는 기계처럼.
그런 건 지휘관이 갖춰야 할 자질이잖아. 그게 왜 걱정이야?
난 훌륭한 지휘관보다…… 버든비스트에서 허겁지겁 굴러떨어지던 그 녀석을 더 신뢰해.
전하, 지금이 과연 카즈델을 공격할 좋은 기회인 게 맞을까?
네 직감은 늘 정확했지.
전하는 걱정되지 않아?
……
근데, 기억나?
지난 몇 년 동안, 우리가 극복할 수 없어 보이는 절체절명의 상황을 몇 번이나 겪었지. 하지만 결국 모두 이겨냈어.
내 생각엔,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
하지만 우린 계속 위험한 모험을……
아스카론. 바벨은 많은 사람들의 희망과 신념을 짊어졌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올 수 있었던 거야. 같은 자리에 계속 머무를 순 없어.
지금까지 대항하면서, 우린 계속 군사위원회에 밀려왔었지. 그런데 지금, 그 주력 부대가 대부분 런디니움으로 향하게 됐어. 이건 다신 없을 기회야. 우리한텐 다른 선택지가 없어.
……
반드시 곁에서, 전하의 안전을 지키겠어.
아냐, 아스카론.
나중에는 더 먼 곳으로 가서 더 많은 사람들을 지켜야 해.
지금은, 햇빛이나 좀 쐬면서 한숨 돌리자.
전하……
아참, 맨날 서서 쉬지 말고, 피곤할 땐 방에 들어가서 푹 자.
알았어.
응……
햇빛이 다시 아스카론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햇빛은 맑고, 따뜻했다. 그러나 테레시아가 사라진 그 순간, 그녀는 돌연 자신의 가슴에 한 가지 이상한 게 생겼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는 그게 뭔지 몰랐지만, 몇 년 뒤 햇볕이 따사롭던 어느 날 홀연 깨닫게 되었다.
그게 아쉬움이란 감정이었다는 것을.
빅토리아, 런디니움
용병!
공작님께 전해라. 이번에 런디니움을 공격한 건, 아주 잘했다고.
한 시간 뒤 중앙 구역에서 집결한다. 그곳에서 사열을 받고, 현상금을 받아 가라.
……어이! 듣고 있나?
그래. 명령은 잘 받았다.
공작에게 전해라. 우리가 제때 도착할 거라고.
……살카즈는 그분의 기개에 감사한다.
쯧.
마족 놈들, 허세 부리긴……
……
포탄의 연기가 자욱하지 않았다면, 오늘 런디니움은 보기 드문 좋은 날씨였을 것이다. 우뚝 솟은 성벽에 서면, 이 오래된 도시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옷이 피로 물든 장군은 한마디도 없이, 도시 한가운데 우뚝 솟은 건물을 주시하고 있었다.
런디니움의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