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1불편한 만남
삼족 의회에서 서로 날을 세워가며 맞서기 시작하는 세 가문. 팽팽한 대립이 이어지던 도중, 엔시오데스가 세 가문의 권력을 성녀에게 이양하자는 제안을 하자, 회의장에서 격렬한 논쟁이 오갔다. 결국, 성녀 엔야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는데……
쯧, 너무 늦는 거 아냐?
조용히 해, 시우루스. 시끄러워서 생각을 못 하겠잖아.
더 이상 생각할 게 뭐 있나? 엔시오데스는 이번에야말로 땅을 내놓게 될 텐데.
유카탄, 넌 어떻게 생각해?
……저도 시우루스와 같은 생각이지만, 엔시오데스 님께서 순순히 땅을 내놓을 것 같지는 않네요.
네 와이프랑은 달리 그래도 생각은 하고 말을 내뱉는구나.
누가 생각을 안 한다는 거야?!
당연히 널 말하는 거지, 우리 이쁜 동생아.
아크토즈 같은 근육 뇌는 성산과 관련된 일이라면 똥 마려운 개처럼 안절부절못하니까 말이야. 나도 이렇게나 빨리 엔시오데스와 척을 지고 싶지는 않았다고.
엔시오데스는 곱게 죽어 줄 사람은 아니야. 하물며……
녀석이 그리 쉽게 단념할 것 같지는 않단 말이지.
흥, 내가 말했잖아……
시우루스, 내가 조용히 하라고 했을 텐데. 입이 그렇게나 근질거리면 나가서 산이랑 이야기나 하고 와.
물론 다시는 이곳에 들어오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쳇, 알았다고. 다물고 있으면 되잖아.
(작은 목소리로) 자기는 실컷 떠들고 있는 주제에.
……
아크토즈 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겨울의 성산 꼭대기에는 찬바람이 끊임없이 불고 있었지만, 아크토즈의 눈빛과 바닥을 스치는 도끼 소리는 마치 아크토즈가 찬바람을 일으키기라도 한 듯한 착각마저 들게 했다.
이야 이게 누구야. 나의 오랜 친구, 아크토즈잖아.
엔시오데스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나라고 아는 줄 알아?
난 너희들끼리 만나 알아서 해결할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그랬다면 난 여기서 머리를 싸맬 필요도 없이 즐겁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겠지.
설마 천하의 라타토스가 골머리를 썩을 줄이야.
항상 괜찮을 리가 없잖아? 귀찮은 일 투성이라고.
예를 들면, 요즘 내 영지의 사람들이 엔시오데스의 영지에서 돈을 벌고 싶어 한다던가.
네가 오늘, 네 부하 중 가장 유능한 녀석인 굴로를 왜 데려오지 않았다든가 하는 일 말이야.
감기 걸렸어.
쉐라그에서 가장 굳건한 전사가 감기라니, 나쁜 징조인걸.
엔시오데스 부하, 그 노시스한테 좀 보여달라고 해야겠네.
가만히 두면 알아서 회복할 거야.
그래, 그래. 쓸데없는 참견이었군.
어쨌든, 너도 왔으니 이제 남은 건 엔시오데스 뿐이네.
아직 3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지 않았는데 말이지.
오래 기다리게 했군.
에, 엔시오데스 님과 대장로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음?
두 사람이 동시에 들어오다니, 별일이 다 있네……
엔시오데스, 설마 성녀님께 기도를 드리고 온 거냐?
그래. 기도를 드리다 우연히 대장로님을 만나 이야기를 좀 나눴지.
먼저 들어가시지요, 대장로님.
그럼 실례하지.
대전당의 입구가 닫히자, 실내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중앙에 앉은 대장로를 사이에 두고 아크토즈와 라타토스는 왼쪽에, 엔시오데스는 오른쪽에 자리를 잡았다.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편이 명확하게 나누어져 있었다.
삼족 의회는 전통적으로, 다 함께 둘러앉아 올해에는 어느 가문이 조금 더 힘을 보태면 좋을지, 또 어떤 가문이 도움이 필요한지에 대해 논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이번 의제가 이런 내용일 줄은……
그건 엔시오데스에게 물어보시죠.
그렇게까지 날을 세울 필요는 없다, 아크토즈.
대장로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삼족 의회는 서로를 비방하는 자리가 아니다.
엔시오데스, 굳이 그런 얘길 꺼내는 걸 보니 찔리는 게 많나 보지?
자자, 다 모였으니, 지금부터 삼족 의회를 시작하도록 하지.
쉐라간드 신이시여.
쉐라간드 신이시여.
이번 삼족 의회의 목적에 대해서는 여기 있는 세 명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난 번 회의에서 아크토즈와 라타토스가 실버애쉬 가문이 보유 중인 계곡과 광산 지역의 통치권을 페일로쉬 가문과 브라운테일 가문에 양도하라는 제안을 발의했었지.
그리고 실버애쉬 가문을 삼족 의회에서 퇴출하고자도 했었고.
노시스 에델바이스는 제가 직접 해임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른 두 명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어떻게 믿지? 노시스는 네 심복이야. 노시스의 배후에 네 녀석이 없었을 거라고 우리가 어떻게 확신하지?
노시스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제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야!
아크토즈, 너무 멋대로 넘겨짚는 것 아닌가?
엔시오데스, 난 지금까지 네가 벌인 많은 일들을 용인해 왔다. 네 영지에 공장을 짓고, 사업을 진행하며, 너의 외국인 친구를 불러들이는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야.
네 녀석의 영지니까 네가 밥 하든 죽 쓰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넌 철도를 성산 근처로 연장하면서 역겨운 돈 냄새를 성지에 퍼뜨렸다. 게다가 성산의 기슭까지 광산을 확장해 몰래 채굴하기도 했지.
넌 대체 성산을 뭐로 보고 있는 거냐? 쉐라간드 신이 어디에 계신다고 생각하는 거지?
감독관이 공장을 조사하지 못하도록 더러운 수를 썼지? 덕분에 내 부하들은 아직까지도 침대에 누워 있다.
전부 에델바이스 가문의 그 빌어먹을 녀석이 한 짓이라고 말하고 싶나?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내가 가장 신뢰했던 동료였기에, 노시스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쥐여 주었던 것은 내 잘못이다.
그 점은 나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라타토스, 넌 어떻게 생각하지? 우리들의 관계에 더 이상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나?
물론 나도 널 도와주고 싶기는 하지.
6년 전, 네가 이곳에 다시 발을 디딜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도 나였고. 그렇기에 너를 내 손으로 직접 쫓아내야 한다면, 나도 무척 마음이 아플 거야.
하지만 이번 일에는 쉐라그 전체가 연관되어 있어. 이번에는 널 도와줄 수가 없단 말이야.
내가 알기로는, 투리쿰에서 브라운테일 가문도 적지 않게 이득을 본 걸로 기억하고 있는데.
맞아. 나뿐만 아니라 영지 주민들도 돈을 벌 수 있는데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냐? 아크토즈 같이 꽉 막힌 녀석이나 싫어하지.
하지만 엔시오데스, 나처럼 사람들이 뒤에서 씹거나 요부라고 불리는 여자도,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 정도는 구분하고 있어.
네가 4년 동안의 유학 생활에서 뭘 보고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너로 하여금 신앙을 버리게 만들었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거든.
6년 전의 나는 너를 잘못 판단했지, 엔시오데스. 나는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를 생각이야. 하지만 그전에, 네가 먼저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그렇다고 한들 계곡과 광산 구역, 그리고 삼족 의회 등 모든 일에서 실버애쉬 가문을 퇴출하겠다니. 대가치고는 너무 과한 것 아닌가?
카란 무역은 당시 사건을 주도했던 노시스를 이미 제명한 데다가, 최근 회사의 방침이 누그러졌다는 사실 또한 누가 봐도 명확하게 알 수 있을 텐데.
이미 늦었어, 엔시오데스.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너는 또다시 과오를 반복할 테니까 말이야.
엔시오데스. 용서를 원한다면, 애초에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였어.
하지만 일이 이 지경이 된 이상, 지금 여기에서 그 대가를 치러야지.
계곡과 광산을 넘길 것인지. 삼족 의회에서 퇴출당할 것인지. 확실히 대답하도록.
……
내가 한 일들은 모두 쉐라그의 번영을 위해서였다.
페일로쉬 가문, 그리고 브라운테일 가문과의 관계가 이렇게까지 악화되는 건 나 또한 원하지 않아.
하지만 대화를 나눠 보니, 두 사람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건 이미 피할 수 없는 일인 것 같군.
이런 순간이 올 것이라는 걸 예상은 했었지만, 막상 대전당에서 이렇게 직접 마주 보고 탄원을 하니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프군.
하지만 나로서는 쉐라그를 다스리는 세 가문이 분열하는 모습을 두고 볼 수만은 없어.
세 가문이 분열한다는 건 곧 쉐라그가 분열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이는 곧 쉐라간드의 백성들이 터전을 잃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
엔시오데스…… 네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단 한 순간이라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면……
지금 당장 쉐라그에서 꺼져! 그리고 빅토리아로 돌아가라! 쉐라그의 평화를 위해서 말이다!
아크토즈. 나, 엔시오데스 실버애쉬는 실버애쉬 가문의 가주이다.
이는 즉, 쉐라그의 미래를 위해 내 책임을 다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네가 날 빅토리아로 보내려는 의미를 모르겠군. 회의에 두 가문만 참석한다면, 자신이 더 주도권을 가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인가?
게다가 최근 몇 년간 실버애쉬 가문에 의해 진행된 개혁은, 내가 지휘했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지……
나의 주민들은 내가 도입한 방식을 이용할 뿐만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발전시켜 나가는 중이다.
내가 영지를 떠난다고 하더라도 공장의 기계들은 계속해서 돌아갈 것이며, 기차는 여전히 철도를 달리고 있겠지.
하지만, 만약 내가 계곡과 광산 지역을 넘기고, 공장과 철도를 정지시킨다면……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덕분에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과연 동의할까?
그건 네가 해결할 문제야, 엔시오데스.
아니, 라타토스. 나의 문제 해결 능력을 높이 사고 있는 모양인데, 이 문제는 단순한 내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몇 년간 브라운테일 가문의 영지 주민 중 카란 무역의 혜택을 조금이라도 받지 않은 사람이 있나?
카란 무역이 컬럼비아에서 수입한 오리지늄 난로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추위에서 구해 주었는지 아나? 이곳은 재앙이 닥치지 않는 대신에 혹한이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아 가고 있지.
목자들이 쓰는 지팡이, 빅토리아에서 수입한 비료. 이 물건들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지?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건 바로 너야. 그리고 넌 이런 상황을 이용해 우리에게 협박이나 하고 있지.
그럼 가서 말해 보시던가. 이 모든 게 네 덕분이라고. 너는 쉐라그가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능력도 없고, 사람들이 이 실버애쉬의 가문의 가주를 얼마나 비웃던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이야.
틀렸다, 라타토스.
협박이란 그걸 이룰 힘이 없는 사람들이 허세를 부릴 때나 쓰는 행위에 불과하다. 그리고 난, 사실을 얘기했을 뿐이고.
카란 무역이 쉐라그를 위협한다고? 웃기고 앉아있네.
큿……
기세가 아주 넘쳐나는걸, 엔시오데스. 확실히 넌 어릴 때부터 그런 얘기를 곧잘 하곤 했지.
헛소리는 집어치워라, 엔시오데스.
넌 오늘……
오늘 내가 영지를 넘기지 않는다면, 진작부터 계곡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굴로 장군이 계곡을 '접수'할 건가?
너……
그렇게 성급하게 무력을 사용하려 들지 마라, 아크토즈.
너희들의 제안에 응해 줄 수 있다.
분쟁을 일으키려 했던 건 아니다. 그저 가주로서 가문의 손해를 용납할 수 없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 가슴 아픈 사태를 종결시키기 위해, 그리고 설산 삼대 가문의 단결과 쉐라간드의 백성들을 위해, 실버애쉬 가문이 한 발자국 물러서도록 하지.
……계곡과 광산 지역을 넘기도록 하겠다.
……정말이야?
말이야 누구나 할 수 있지! 엔시오데스, 이곳에서 네 헛소리를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
조급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크토즈.
성급함은 곧 너의 약점이다. 쉐라간드를 지키는 도끼이자, 쉐라그에서 가장 경건한 전사여.
너희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하지만 내가 소유권을 넘기는 건 페일로쉬 가문도, 브라운테일 가문도 아니다.
그럼 누구에게 넘기겠다는 거냐! 쉐라간드께 바치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정답이다. 아크토즈, 쉐라간드의 가장 경건한 백성이여.
실버애쉬 가문을 비롯한 모든 가문의 영토는 전부 쉐라간드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넘겨받은 땅이며, 그에 따라 쉐라간드를 대신하여 관리하고 있을 뿐이다.
……잠깐만, 너 설마……
바로 그거다, 라타토스.
지금부터 실버애쉬 가문의 계곡과 광산 지역을 전부 만주원에 넘기도록 하겠다. 이제부터는 성녀님께서 공장과 광산을 관리할 것이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삼대 가문 간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는, 삼대 가문과 설산 주민들에게서 가장 신뢰받는 인물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쉐라간드의 대변인이 다시 한번 쉐라그를 통치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하고 또한 실버애쉬 가문의 자산을 무사히 처분하고, 삼대 가문 간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는 것이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것이니.
이러한 전제하에, 실버애쉬 가문의 계곡과 광산 지역을 넘기도록 하겠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회의장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옆에서 듣고 있던 귀족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그 말속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다.
기록관의 펜 소리만 사각사각 회장에 울려 퍼졌지만, 그것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차디찬 분위기 속에서 얼어붙었다.
정적을 깨뜨린 건 펜을 떨어뜨리는 소리와 누군가의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것은, 마치 저온에서 튀겨지는 뢰슈티처럼 성량을 낮춰 수군거리는 말소리였다.
……
봐봐, 저 사람 혹시 에델바이스 가문의 그 사람 아냐?
노시스 자식, 여기에 나올 낯짝은 있었나 보지? 퉷!
……
노시스가 이쪽을 보고 있어!
쳇, 저 녀석의 눈빛을 봐. 도대체 엔시오데스 님은 어째서 저런 녀석에게 중책을 맡기신 걸까? 저 녀석 부모가 살인자라고 하던데……
퉤퉤퉤, 그런 말 하지 마. 성산에서 그런 말을 하면 쉐라간드의 노여움을 산다고!
……저 녀석의 봄날도 이제 끝났어. 엔시오데스 님도 이제 더 이상 못 참는 게 보이잖아.
정말로? 엔시오데스 님께서 드디어 저 녀석을 내치시는 건가?
맞아. 아직도 모르고 있었어? 지난달 회의에서 엔시오데스 님께서 직접 노시스를 해임했어……
벌써 해임됐다고? 잘 됐네, 잘 됐어! 진작에 그러셨어야 했는데!
……
노시스님.
우리는 이런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어선 안 된다고 말했을 텐데.
네, 죄송합니다.
다급히 소식을 받아서요. 로도스 아일랜드 일행이 탄 열차가 성산 기슭에 위치한 역에 곧 도착한다고 합니다.
로도스 아일랜드에 관심이 있으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한번 보러 가시겠습니까?
설산도 이미 이런 상황이니, 로도스 아일랜드가 끌려들어 온 외력이라면, 일부러 만나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될 거다.
게다가…… 지금의 난 정직 처분을 받았는데, 무슨 입장으로 그들을 만난다는 거지?
……노시스 님……
……엔시오데스가 다른 두 가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노시스 님께 죄를 뒤집어씌우다니. 정말로 실망스럽기 그지없군요.
비위를 맞춰? 엔시오데스의 생각이 그렇게 단순할 리가.
로도스 아일랜드가 엔시아의 광석병이 악화되는 걸 늦추는 일에 성공했다지?
네……
음, 확실히 실버애쉬 가문이 눈여겨볼 만하군.
뭐, 엔시오데스의 눈에 띈 것이 행운인지 불길일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말이야.
그 말씀은……
말 그대로의 의미다.
회사는 어떻지? 내가 해임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녀석들은 전부 아까 그 귀족들처럼 손뼉을 치며 환영하고 있겠지.
……노시스님의 가치를 모르는 것일 뿐입니다.
가치라는 말로 사람을 표현한다면, 그 사람은 측정될 수 있다는 걸 의미하지.
노시스님……
지금 엔시오데스는 삼족 의회에서 성녀에게 삼대 가문을 통치하게 만들겠다는 의견을 내놓았겠지.
대전당은 지금 아주 혼란스러울 거야.
엔시오데스, 결국 이 지경까지 이르렀나.
……엔시오데스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건 노시스 님뿐입니다. 그러니 노시스 님만이 엔시오데스의 야망을 막을 수 있겠죠.
……
바람이 세군. 곧 눈이 내리겠어.
커다란 눈송이가 노시스의 어깨에 내려앉았다가, 곧 바람에 실려 날아갔다.
쉐라그에서 눈보라는 드문 일이 아니다. 충분히 두껍게 쌓인 구름은 그저 기회만을 기다릴 뿐.
구름층을 떠받치던 기류의 균형이 깨져, 이를 지탱하던 힘이 사라지게 된다면……
지금의 엔시오데스는 성녀를 쉐라그의 왕으로 모시겠다는 건가?!
말도 안 된다! 설마 그 엔시오데스가!
하지만 방금 꺼낸 제안들은 진심으로 들린다……
어쨌든, 쉐라그가 성녀 아래서 단결할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 쉐라간드의 땅이 쉐라간드에게 돌아가는 것뿐이니까!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는 점점 커져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마저도 파묻혔다.
……엔시오데스,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한 건지 알고나 있는 거야?
아주 잘 알고 있지.
그럼 우리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볼까?
처음에는, 내가 제대로 된 성과를 내놓아 실버애쉬 가문의 진심을 보여 준다면 너희들이 선입견을 버리고 나와 협력하여 함께 쉐라그를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세 가문이 손을 맞잡을 수만 있다면 더 큰 소득은 물론……
국가적으로 시행되는 대외무역은 단순 사기업의 양상과는 전혀 다르니, 이에 따라 얻어 낼 수 있는 성과 또한 천지 차이겠지.
내가 너무 앞서간 탓에, 내가 쉐라그를 외세에 팔아넘길 거라는 착각이라도 했나 보지?
그럼 아니라는 소리인가! 엔시오데스, 성산은 네 놀이터가 아니야! 쉐라간드 신께서는 네 거짓말을 간파하고 심판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성산이 나를 쫓아내지 않았다는 것이야말로 내가 그릇되지 않았다는 증명이라 할 수 있겠지.
이제 그만하지. 나로서는 너희들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아주 잘 알았고, 너희들의 짧은 안목 때문에 카란 무역의 방침을 바꾸고 싶지도 않으니까 말이야.
카란 무역에 있어 쉐라그의 광산과 공장은 매우 중요하지만 모든 것은 아니다. 그것 때문에 회사가 멈춰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지.
계속 이런 식으로 대립하면서 의견을 통일시키기 위해 기력을 소비하게 된다면, 오히려 외부 위협에 기회만 줄 뿐이다.
그건 나 역시도 바라지 않아.
그래서……
난 최후의 결정을 성녀님께 맡기기로 결정했다.
성녀님께서 결정을 내리신다면 나도, 그리고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도 전부 납득할 수 있겠지.
헛소리!
쉐라간드에 대한 신앙을 짓밟은 사람이 그딴 소리를 하면 누가 믿겠는가!
쉐라간드에 대한 신앙을 짓밟았다고?
그게 네 생각인 건 알고 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카란 무역이 가져온 변화를 색안경을 끼고 지켜보는 중이지.
하지만 노동은 쉐라그를 이루는 근간이다.
잊지 마라. 브라운테일 가문의 사람들은 정오에 하던 일을 멈추고 성산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일은 없었지.
일이 바쁘면, 매달 성산에 가서 말씀을 듣지도 않았고.
하, 엔시오데스. 그런 식으로 강제로 개념을 바꾸려고 해도 설득력이 없어.
설마 지금 네가 설산에 하는 모든 것이, 쉐라간드의 가르침에 따른 일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쉐라간드》, 1장 1절.
“쉐라간드의 눈물은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이며, 그분의 등은 견고한 암석이며, 그분의 숨결은 차가운 겨울바람이며, 그분의 웃음은 봄날의 태양 빛이도다.”
“쉐라간드께서 깨어나시면 산들은 그 소식을 알리는 전령이 될 것이며, 하늘은 오색찬란한 빛을 내뿜을 것이다.”
성산이 그분을 의미한다는 구절은 그 어디에도 없지.
카란봉이 특별한 이유는 만주원이 바로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내가 만주원에 해악을 끼쳤다고 한다면, 나도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성심성의를 다하겠다.
또 이렇게도 쓰여있지. “근면한 자는 권력을 잡을 것이며, 게으른 자는 고통받을 것이다.”
난 그분의 가르침을 어긴 적이 없다.
터무니없는 궤변이군!
만주원이야말로 이 땅에서 쉐라간드의 대표이고, 만주원의 성녀님이야말로 이 땅에서 쉐라간드의 대변인이다! 그 사실은 네 녀석의 말 한두 마디에 좌지우지될 수 있는 게 아니야!
대장로님, 만주원은 이런 망언을 듣고도 가만히 있는단 말입니까?
이 늙은이 역시 엔시오데스의 말에 함부로 동의하기는 힘든 노릇이라네.
하지만 대학원에서도 쉐라간드 님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 차이로 다투는 일이 비일비재하지. 만주원이 기존의 해석과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아니라네.
누가 옳고 그른지는,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크토즈.
그리고 3장 5절.
“쉐라간드가 산에서 고개를 드실 때까지, 쉐라그에는 한 무리의 야만인만이 살고 있었다.”
엔시오데스가 운을 떼자, 회장 안의 귀족들은 엔시오데스를 따라 경전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분이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와 야만인들과 함께 살아가셨다. 이에 야만인들은 그분의 힘을 두려워하며 그분을 신으로 모셨도다.”
“그분의 주변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곧 쉐라그가 탄생하였으며, 그분은 초대 국왕 되셨도다.”
“그분의 인도 아래에서 쉐라그는 번영을 맞이했도다.”
……
말해 보아라, 아크토즈. 321장의 첫 번째 줄에는 무엇이 쓰여 있나?
“……그분이 나라를 다스리신 지 300년이 지난 어느 날, 왕위를 대리인에게 맡기시고서는 눈보라 속으로 사라지셨다.”
“그때부터 쉐라그는 인간의 손에 의해 다스려졌다.”
여러분. 우리는 쉐라그인이자, 우리 모두 쉐라간드의 백성이다.
내가 앞서 이야기했듯이……
우리의 앞날을 정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나도, 아크토즈도, 라타토스도 아닐 것이다.
그건 바로 쉐라간드의 대리인인 성녀님이시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불신으로 가득 차 있지만, 괜찮다.
성녀님께서 우리를 올바른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게끔 이끌어 주실 테니.
아니면 아크토즈, 넌 성녀님께서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대지의 대변인을 믿을 수 없다는 말인가?
순간 회장에 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아크토즈에게로 향했다.
너……! 엔시오데스, 감히 네가!
……
엔시오데스, 고작 이 정도 도발로 우리를 자극할 생각이었던 거야? 정말 실망인걸.
……
성녀님이 실버애쉬 가문 출신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여기 아무도 없어.
그렇다고 성녀님의 인품을 모르는 사람도 없고.
성녀님은 쉐라그의 성녀님이시다. 쉐라간드의 영광과 책무를 짊어진 그 순간부터, 성녀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쉐라그인들이 전부 지켜보았지.
성녀님은 줄곧 공평하게 일을 처리해 오셨다. 이제 와서 우리가 성녀님의 출신에 이의를 제기할 리가 있나?
……
네 말 대로 관대하신 쉐라간드께서는 쉐라그의 미래를 그의 자손들에게 맡기기로 결정하셨지.
하지만 엔시오데스, 네가 지금 이 타이밍에 쉐라간드를 언급하고, 그분의 미덕과 자애를 거창하게 이야기하는 건, 정말로 다른 의도가 없어서인가?
엔시오데스! 너야말로 성녀님에게 불경하고, 교묘한 말로 협박하여 이용하려 하는 거 아냐?!
이건 심각한 모욕이다, 라타토스. 네가 카란 무역을 모욕한 것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모욕이지.
이 이상은 우리끼리 이야기해 봤자 헛수고다. 성녀님을 이 자리에 모셔와 직접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지.
흥, 그렇다면 불만은 없다. 세 가문이 전부 모여 있는 자리에서 너도 수작을 부릴 수 없겠지.
그러면 공정을 가하기 위해 성녀님을 모셔 오는 것을, 대장로님께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럼 이 늙은이가 다녀오도록 하지. 자네들은 조급해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게.
……
눈이 내리고 있네요.
이상할 게 있나. 이곳은 눈이 끊긴 적이 없었어.
아니요. 평소랑은 다른 느낌이에요.
……
……엔시오데스 오라버니가 세 가문의 권력을 제게 양도하고, 제가 쉐라그를 이끌어 나가라고 제안했다는 거죠?
맞아.
엔야, 너는 어떻게 생각해?
저는……
대장로님.
여기 있었구나, 엔야.
회의에서 있었던 일들은 이미 들었겠지.
권력 양도에 관한 이야기라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대장로님이 제게 오셨다는 건, 이야기에 진전이 있다는 말이겠죠?
……그래, 넌 어렸을 적부터 매우 총명한 아이였지.
세 가문의 불화는 이미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삼족 의회 전에 실버애쉬가 내게 암시를 해주었다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실버애쉬의 제안은 오히려 완화책이지.
……
대장로님께서는 지난번 회의에서 한 제 행동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모양이시군요.
엔야……
보거라…… 이 산과 들을 전부 뒤덮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눈이 내려야 했는지 아느냐?
우리 발밑의 거룩한 산봉우리가 솟아오르기까지는,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아느냐?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쉐라간드의 눈물은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이며, 그분의 등은 견고한 암석이며, 그분의 숨결은 차가운 겨울바람이며, 그분의 웃음은 봄날의 태양 빛이도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쉐라간드의 은총이라면, 그 백성들이 눈보라를 두려워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
……이런 점에서는 너희들은 비슷하면서도…… 다르구나……
네……?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늙은이의 혼잣말일 뿐이야.
우리 성녀의 말도 맞아.
성녀는 늘 산봉우리에 있었으며, 뭇 산들도 쉐라간드의 대리인에게 고개를 조아렸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지.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쌓여 온 눈이 한순간에 무너진다면, 쉐라간드의 백성들은 그 눈에 묻혀 버리지 않겠나?
……
이 늙은이에게 있어서는, 쉐라그의 안녕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이지.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일 거라고 믿는다.
아…… 벌써 이런 시간이군.
모두 대전당에서 성녀를 기다리고 있다. 성녀가 나타나는 시간은 너무 빨라도, 너무 늦어서도 안 되니까, 지금이 적당하겠구나.
두 분, 이쪽으로 오시죠.
……알겠습니다.
쉐라그의 안녕이라……
눈은 계속 쌓이고 있는데 우리가 눈을 치우지 않는다면, 쉐라그가 더 평화로워질까요?
……
쉐라간드 신이시여, 부디 당신의 백성을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성녀님 납시오.”
산을 뒤덮는 바람과 눈 속에서…… 청아한 방울 소리가 마치 하늘 끝에서 내려와 쉐라간드 백성들의 귀에 들리는 듯했다.
성녀가 지나가자, 귀족들은 극진한 예를 차리며 가장 경건한 기도를 올렸다.
“성녀의 뜻과 함께 서리가 내렸으니, 이는 쉐라그에 축복을 내리기 위함일지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성녀님.
엔시오데스 님은 업무가 다망하여 기도를 올리러 오지 않으셨으니, 확실히 오래간만에 뵙는군요.
성녀님께서 계곡과 광산 지역의 조사를 부탁하셨으니, 당연히 소홀히 할 수는 없었습니다.
맡겨 주신 일을 끝마치면, 제가 직접 성산에 올라 기도를 드리러 갈 예정이었습니다.
엔시오데스 님의 신앙심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는데, 그런 형식적인 예법으로 증명할 필요가 있을까요?
성녀님도 농담을 할 줄 아시는군요.
……
여동생분께서 쉐라그로 돌아오셨다지요?
소식이 빠르시군요. 네, 지금 귀빈과 함께 성산으로 오는 중입니다.
귀빈이라니요?
네. 제 동생은 지금까지 줄곧 로도스 아일랜드라는 제약회사에서 광석병을 치료하고 있었습니다.
대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감사의 표시도 할 겸 로도스 아일랜드의 지도자를 초청했습니다.
엔시오데스 님께서 동생분께 그렇게나 정성을 쏟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성녀님께서는 저의 제안에 대해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성녀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아크토즈 님과 라타토스 님은 어떻게 생각하시죠?
……저, 아크토즈의 신앙심은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성녀님께서 저희 세 가문의 중재자가 되시는 건 물론이고……
자, 잠깐, 아크토즈……!
……저희 가문 자체를 성녀님께 맡기더라도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라타토스 님은 어떻게 생각하시죠?
이렇게까지 됐는데 누가 거절한다는 말인가?
이렇게까지 됐는데 누가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
지금 이 상황에 저희 세 가문의 중재자가 되어 주신다면, 그 무엇보다 좋은 선택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
알겠습니다.
세 가문의 가주님들께서도 제게 신뢰를 맡기셨으니, 저를 믿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기대에 답하고, 쉐라그를 이끌어나갈 책임을 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