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마조마한 귀향길
옥문을 떠난 후 줄곧 산해중 잔당의 행방을 쫓던 치우바이, 산해중 소굴에서 한 소년을 발견한다. 소년이 잘못된 길에 들어선 걸 알게 된 치우바이는 그 소년을 집까지 데려다주기로 한다.
등장 오퍼레이터: 치우바이
엄마, 아빠는 또 멀리 떠났어? 이번에는 얼마나 있다 돌아온대?
강의 얼음이 거의 다 녹았어. 올해는 강우량도 적당해서 가뭄도 홍수도 없는 한 해가 될 것 같아.
상류에 개간한 땅은 크지 않지만, 모내기하면 우리 식구들이 먹기엔 충분할 거야.
엄마, 이제 아빠한테 '장사' 같은 건 그만하라고 하면 안 돼? 이젠 새 옷도, 예쁜 장식 같은 것도 필요 없어. 우리 한 가족이 단란하게 모여 사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나 조금, 무서워……
가난한 마을 있다면 부유한 마을도 있으니. 잡초와 벼가 함께 기지개를 켜네.
발이 닳도록 천 리 길을 가면, 산악과 호수가 마을을 이루네.
후우…… 후우……
앞은…… 벼랑인가……
젠장, 빌어먹을! 이젠 진짜 도망칠 곳도 없어……
안 돼, 당황하면 안 돼…… 싸워서 이길 순 없어도, 길에 설치한 함정이라면 그 여자를 고생시킬 정도는 될 거야.
이따가 잡으면 제대로 혼쭐을 내줘야지. 감히 날 우습게 보고……
이제 지친 건가?
어, 어떻게……
오지 마!
나이도 어린 게 잔머리는 제법이네. 네게 사냥을 가르쳐준 사람은 짐승에게 쓰는 함정을 사람에게 쓰면 안 된다는 건 안 가르쳐줬어?
다른 사람이 걸리기라도 하면, 고의 상해라는 죄명이 하나 더 생길걸?
웃기시네…… 고의 상해 따윈 아무것도 아니야. 그동안 해온 나쁜 짓은…… 밤새 얘기해도 끝이 없다고!
그렇다는 건, 여기서 너를 죽여도 마땅하다는 거네?
그래!
아…… 아니야!
그만, 오지 말라고!
여, 여기 폭약이 보이지? 한 발짝만 더 다가오면 심지를 당길 거야. 네 무공이 아무리 뛰어나도 이거면 우리 둘 다 산산조각날걸!
……
좋아, 그럼 여기 서 있을 테니 내 질문에 대답해.
내게서 뭘 알아낼 거라 생각 마!
동굴에 있는 놈들이랑 무슨 사이야?
무슨 사이긴? 내가 걔네 두목인데.
내 부하를 해치웠다고 거들먹거리는 거 같은데, 내가 반드시 원수를 갚겠다!
두목이라고? 너, 몇 살이지?
하, 어린 게 뭐 어때서? 근처에 있는 아무 마을이나 가서 물어봐. 나 '방돌쇠'의 악명을 모르는 사람이 있는지!
이 몸이 한 일을 들려주면 아마 깜짝 놀라서 자빠질걸!
어이가 없군……
반나절 전
방돌쇠야! 방돌쇠!
왜, 왜, 적이라도 찾아왔어?
드디어 싸우러 가는 거야? 이번에는 나도 데려가면 안 돼?
제기랄, 옥문에 간 놈들이 어디서 저 마귀 같은 여자를 건드렸는지, 우리 형제들이 거의 다 당했어!
짐 챙길 시간 없어, 얼른 튀어!
무슨 소리야, 상대는 한 명이잖아?
내 앞에서 그렇게 자랑질해 놓고는, 정작 한 명을 못 쓰러뜨린다니……
닥쳐!
쓸데없는 소리 말고. 네게 맡긴 버든비스트는?!
그거…… 팔았어.
팔았다고?!
네가 먹을 거로 바꿔 오라며.
이런 멍청한 놈아! 버든비스트 타고 마을에 가서 우리가 약탈해 온 보석으로 먹을 걸 바꿔 오랬지, 언제 버든비스트를 팔라고 했어?!
보석? 그 돌멩이들? 정육 가게 주인이 그딴 거 알기나 하겠어?
오히려 우리가 키운 버든비스트가 토실토실하다면서 값을 꽤 쳐줬어. 반은 돈으로 받고, 반은 육포로 받았지.
이 자식……!
우리가 이 산속에 틀어박힌 지 얼마나 됐는데! 무슨 버든비스트가 사람보다도 더 처먹는지. 그러다가 터스크비스트라도 불러오면……
*염국 욕설*, 왜 너같이 쓸모없는 녀석을 받아들였는지. 너 때문에 죽게 생겼잖아! 내가 네 놈을 아주……
어린애……?
너…… 너는 누구야……?
다치지 않은 걸 보니 옥문 일이랑은 상관없는 것 같군.
산해중이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건 알았지만, 어린애까지 끌어들일 줄이야…… 생각보다 더 악랄하잖아.
혼자서 뭐라는 거야!
이봐, 분위기 파악 잘해. 오늘 내 부하들을 잡은 건 일단 넘어가 줄 테니까.
지금이라도 얌전히 비키면 못 본 셈 쳐 줄게. 각자 갈 길이나……
보내준다고 한 적 없어.
가까이 오지 말라고!!
경고야, 이 폭약은……
소년이 한차례 바람을 느꼈을 때 품 안에 있던 주머니는 이미 찢어졌고, 육포와 잡동사니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잡동사니 중 목패를 조각해 만든 호신부가 무쇠 열쇠에 달려 있었고, 부적에는 붉은 붓글씨로 '모선 마을'이란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호신부…… 모선 마을?
돌려줘!
이거 너희 집 열쇠야?
네가 무슨 상관인데!
……돌아갈 집이 있는 아이라면 더더욱 멋대로 돌아다녀선 안 되지.
넌 아직 어려서 어떤 사람과 어울려야 하는지 모르겠지. 그건 어쩔 수 없어…… 하지만 적어도 선악 정도는 구별할 줄 알아야 해.
설령 네가 놈들의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다 해도, 만약 놈들의 동료가 나중에 널 찾아오면 어쩔 건데?
선악이 뭐야? 네가 뭔데 나를 가르치려 드는데?
너를 이대로 가까운 관청에 데려가서 사실을 털어놓게 해도 되겠지만.
나도 그건 귀찮아……
그러니까 집까지, 가족에게 데려다줄게.
싫어!
난 죽어도 돌아가지 않아!
그건 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야.
소년은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팔은 꼿꼿하게 펴고 있었지만, 흔들리는 손은 주체할 수 없었다.
네 말을 들을 이유 따윈 없어!
사내대장부가 죽으면 죽었지, 어찌 고개를 숙인단 말이야!
네가 뭐라고 해도 난 너를 따라가지 않아. 자신 있으면 날 죽여 보든지……
그럴까?
여자는 분명 2미터 밖에 있었지만, 다음 순간 귓가에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소년의 몸도 함께 굳어졌다.
소년이 반응하기도 전에 차가운 칼날이 소년의 목에 들어왔다.
……
죽는 게 두렵나 보네.
아주 좋아. 그리 멍청하지는 않군.
사람은 자신의 언행에 책임져야 해. 어리석은 말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운이 좋은 건 아니니까.
나를…… 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야……
앞장서, 집에 데려다줄게.
여기는 산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마을의 유일한 객잔이다.
그리 크지 않은 객잔에서 두 사람은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소년은 자리에 앉자마자 이리저리 곁눈질했고, 옆에 앉은 손님들은 소년을 쳐다봤다.
그러자 치우바이는 조용히 탁자 위에 검을 올려놓았다.
널 도와줄 사람은 없어.
알았어, 알았다고. 툭하면 그걸로 겁주는 것 좀 그만해.
도망치면 쫓고 화를 내면 숨는다. 2주 동안 둘은 함께 지내면서 도리어 '호흡'이 척척 맞게 되었다.
이 마을을 나가서 계속 북쪽으로 가다가 황폐한 숲을 지나면 북쪽에서 강이 하나 보일 거예요. 그 강을 지나면 산이에요. 들어가는 길은 하나뿐이니 길을 따라가면 돼요.
산에 마을이 몇 개 있긴 한데, 최근에 꽤 많이 떠났다고 들었어요. 손님이 찾으시는 '모선 마을'이 아직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대략 얼마나 걸릴까요?
워낙 산길이 험한 터라, 아무리 빨라도 한 주는 걸릴 거예요.
맞다, 봄이 오고 날씨가 따뜻해져서 짐승들이 출몰할 거예요.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고마워요.
'강호'를 떠도는 것치고 집에서 그리 멀리 나오지는 못했네…… 일부러 날 반대 방향으로 안내하는 줄 알았는데.
강호가 얼마나 넓은데. 몇 발 나가지도 못하고 재수 없게 너를 만났으니까 그렇지……
그리고 나 바보 아니야. 사람이 없는 곳으로 데려갔다가 같이 굶어 죽으면 어떡하려고?
도망치더라도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지.
의외로 똑 부러진 면이 있네.
일단 뭐 좀 먹자. 마을을 떠나면 언제 또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을지 몰라.
뭐 먹고 싶어? 알아서 시켜.
뭐든지 다 돼? 네가 낼 거야?
나도 돈이 얼마 없어. 이따 돈이 부족하면 너를 여기에 두고 일을 시켜야지 뭐.
농담도 참, 저희는 작은 객잔이라 요기할 만한 음식밖에 없어요.
쳇, 내가 사양할 줄 알고? 메뉴판 줘!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이거…… 전부 다 줘!
꼬마 손님, 두 분이 드시기에는 좀 많은 것 같은데요……
(찻물을 찍어 탁자 위에 글씨 쓴다)
네……?
(“유괴됐다……”)
……!
(“위병을……”)
다 골랐어?
대충, 일단 이렇게 줘!
아…… 알겠습니다……
어디 가?
화장실 간다. 왜, 같이 가게?
……
수작 부릴 생각은 하지 마.
아까 저 아이가 책상에 납치됐다고 글을 써서 보여주더라고요……
들어올 때 별 이상한 점이 없어서, 그냥 평범한 남매인 줄 알았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어디에 있지?
……
후우……
저 여자…… 여기까지 쫓아오진 못하겠지……
흥! 날 잡겠다고? 꿈 깨.
하아, 지지리도 재수가 없지……
'산해중'은 개뿔! 무슨 대단한 패거리에 붙은 줄 알았더니, 고작 한 명도 당해내지 못하다니. 덕분에 나까지 도망치는 신세가 됐잖아……
돈도 못 벌고 무공도 못 배우고, 겨우 챙겨온 육포 한 봉지마저 잃어버리고……
방돌쇠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닥은 딱딱하고 얼음처럼 차가웠다.
소년은 분을 못 이겨 몇 마디 욕했지만, 정작 배에서 더 큰 요동 소리가 났다.
세상을 떠도는 소년, 등에 달라붙은 뱃가죽, 머리 위에는 드넓은 하늘이, 발밑에는 광활한 땅이 펼쳐져 있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아까 밥이라도 좀 먹고 도망칠걸. 이제 어디로 가나……
내가 말했지. 세 번은 없다고.
너 어떻게……
내 인내심도 한계가 있어.
대체 왜 나를 붙잡지 못해 안달인 거야?!
너 혼자 황야에서 죽을 수도 있어.
죽으면 그만이지, 너랑 무슨 상관인데!
어려서부터 내가 죽든 말든 신경 쓴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자신도 아끼지 않는 목숨을 왜 다른 사람이 신경 써 주겠어?
네가 뭘 안다고……
어려서부터 밖을 떠돌며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삶을 네가 알기나 해?
……
착한 척하지 마! 너처럼 무공이 뛰어난 검객이 뭘 안다고……
……!
뒤로 돌아서자 소년은 이 숲에서 배고픈 생물은 본인뿐이 아님을 깨달았다. 어두컴컴한 나무 그늘 밑에서 터스크비스트 한 마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의 시뻘건 눈은 마치 어둠 속의 촛불 같았고, 나지막한 울부짖음은 초목을 떨게 했다.
사, 살려줘……
움직이지 마!
안 움직였어……
소리 내지 마. 도망치지 말고, 등을 보이지도 마.
당황하지 말고 천천히 이쪽으로 와서 내 뒤에 서……
어…… 어떻게……
조심해!
발밑의 부드러운 낙엽을 밟아서인지, 아니면 너무 긴장한 탓인지, 소년은 비틀거리며 바닥에 넘어졌다.
공포의 냄새를 맡은 짐승은 사냥할 타이밍을 낚아챘고, 검객과 짐승은 거의 동시에 뛰쳐나왔다.
전장에서 만났던 도검에 비하면 터스크비스트의 발톱 따위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
만약 뒤에 지켜야 할 아이가 없다면 말이다.
자, 이것 좀 먹어.
네 육포를 망가뜨렸으니, 대신 구운 고기로 갚을게.
너, 괜찮아……?
뭐가?
짐승한테 긁힌 거? 아니면 너 때문에 화난 거?
자…… 받아.
아빠한테 배워서 만든 약이야. 아빠가 사냥할 때 늘 지니고 다녔는데, 긁히거나 물린 상처에 효과가 아주 좋아.
독이라도 들었으면 어쩌려고?
……
소년은 단검을 꺼내 팔뚝에 상처를 냈다. 그러고는 약병을 들어 상처 위로 가루를 뿌렸다.
통증 때문에 얼굴을 잔뜩 찌푸렸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이제 믿겠어?
……
대단한 협객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물쭈물하기는.
쳇, 터스크비스트는 이런 맛이었구나…… 질기고 비려.
불평하지 마, 야외에서 고기를 먹는 게 어디야. 그것도 익힌 걸로.
하긴…… 그 녀석들과 같이 동굴에 있을 때는 몇 달 동안 고기 한 점도 못 먹었거든.
네 '부하'들 말이야? 동네방네에서 이름난 악명 높으신 분인데 밥도 제대로 못 먹었어?
놀리지 말라고……
네 또래에 가족과 싸우고 집 나간 애들은 많이 봤지만, 악명 높다고 자처하는 애는 처음 봐.
……우습게 보이고 싶지 않으니까.
좋은 사람이면 어떻고 나쁜 사람이면 어때, 모두가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면 괴롭힘만 당하니까.
그건 누구한테 배운 궤변이야?
나 스스로 깨달은…… 경험담이다!
반쯤은 정답이야.
모두가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면 널 괴롭히는 사람은 없겠지. 하지만 다들 힘을 합쳐 너를 상대하게 될걸.
적을 만들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을 적대시하지 않는 거야.
저기……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그렇게 대단한 무공은 어디서 배운 거야?
혼자 강호를 5년 동안 떠돌다가, 전장에 가서 5년 동안 단련하면 돼. 그때까지 살아남을 실력이라면 어딜 가도 꿀리진 않을 거야.
……게다가 나는 엄청나게 뛰어난 무공을 가진 사람을 만났었지. 그 사람한테 배웠어.
너보다 더 세?
훨씬 더.
그럼, 내가 지금부터 열심히 단련해서 너 정도 실력을 갖추는 데 얼마나 걸릴까?
10년.
10년?!
그때까지 살아남으면.
누…… 누나.
……뭐?
협객 누나…… 날 제자로 받아주면 안 돼?
앞으로 누나만 따라다닐게. 강호를 떠돌든 다른 사람을 돕든, 이제부터 누나는 내 사부야!
난 제자 안 받아.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무공을 가르치지도 않고.
너처럼 정직하지 않은 녀석에게 무공을 가르쳤다가, 나중에 나쁜 짓이라도 하면 그건 다 내 죄가 되잖아?
아니야, 약속할게. 내가 누나처럼 대단해져서 더는 괴롭힘을 안 당하게 되면, 무조건 누나 말에 따르고 누나처럼 좋은 사람이 될게.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 그렇겠지, 아마도……
날 구해주고 먹을 것도 줬잖아……
누나는 무공도 대단한데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지 않고 돈 주고 물건을 사잖아. 그 녀석들과는 달리……
선과 악을 완전히 구분 못 하는 건 아니네.
근데 아직도 이해가 안 가. 왜 날 구한 건지……
누나처럼 대단한 협객들은 원래 '참견'하기 좋아해?
질문이 너무 많아.
그럼…… 제자로 안 받아줘도 되니까, 같이 다니게 해 줘. 어디든 다 좋아. 집에만 보내지 말아줘.
나도 뭐 하나만 묻자.
계속 집 열쇠를 갖고 다니면서 왜 안 돌아가려는 거야?
……아직 때가 아니야.
난 집을 떠날 때 결심했어. 반드시 큰일을 이뤄내고 돌아가겠다고.
집에 가족은 있니?
내게 기억이 생겼을 때부터 엄마는 없었어. 아빠는 아직 살아있을 거야…… 다른 가족은 없어.
그럼 더 집으로 가야겠네. 아버지가 걱정하실 거잖아.
돌아가도 아빠는 안 좋아할 거야…… 마을 사람들이 다 날 미워하고 무시하고 괴롭히거든…… 말해도 누나는 모르겠지만.
아까도 말했다시피 다른 사람과 잘 지내려면 적대시해선 안 돼.
게다가 너처럼 어린애한테 원한이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 그래?
나도 말했다시피 내가 한 나쁜 짓을 들으면 누나는 깜짝 놀라서 나자빠질 거야.
아무튼 이름을 날리지 않고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아.
네가 이 세상에 살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면, 다시는 그런 소리 못할 거야.
됐다. 난 싸움도 말도 누나한테는 못 당해. 누나 말이 맞다고 치자.
그래도 궁금한데, 왜 누나를 따라가지 못하게 하는 거야?
세상을 떠돌다 보면 곳곳에서 위험한 일을 만나지. 너 같은 어린애는 홀로 바깥을 떠도는 것보다 돌아갈 집이 있는 게 나아.
그럼 누나는? 집이 어딘데?
……난 이제 집이 없어.
그게 무슨 뜻이야? 재앙을 만났어? 아니면 이동도시의 길을 터 주느라 철거된 거야?
없다면 없는 거야. 집도 사람도 더는 없어.
계속 내 얘기만 했잖아. 누나 얘기도 좀 해주면 안 돼? 맞다, 아직 이름도 안 물어봤구나!
치우바이. 복수와 눈이란 뜻이지.
그저 별 이름 없는 사람일 뿐이야. 딱히 사연 같은 것도 없고.
됐다, 싫으면 말아. 누나 같은 협객들은 늘 신비로운 척하니까.
말하지 않는 건, 들어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야.
다 먹었으면 쉬어. 아직 갈 길이 남았으니 체력을 보충해야 해.
“숲을 지나 강을 건너면 산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산이라기보다는 산으로 이루어진 숲 같았다.
산은 산으로 이어져 있고, 산의 정상이 다른 산의 산기슭과 이어져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고 길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산은 밖의 모든 것으로부터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너무 멀리 떨어져서 시간조차 공간에 막혀있을지 모른다.
거의 다 왔어! 아마 여기일 거야!
일부러 길을 돌아 이 산에 오르려는 이유가 대체 뭔데?
나도 들은 건데! 이 산의 정상에 오르면 가끔 옥문이 보인대!
……
소년은 절벽 위에서 까치발을 들어 서쪽을 향해 바라봤다. 하지만 잡초가 무성한 저편에는 어렴풋이 누르스름한 무언가만 보일 뿐이었다. 소년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비쳤다.
시야 밖에는 다친 이동도시가 지금 정신없이 상처를 어루만지며, 황야 깊숙이 기어다니고 있음을 치우바이는 알고 있었다.
몇 년 전에 내가 이곳을 지날 때는 더 삭막했는데.
여기에 왔었어?
아주 오래전에.
치도 때문이지? 저길 봐!
절벽의 반대편, 한 회색 도로가 황무지 위에서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도로는 지형을 따라 굽이굽이 시야의 저 끝까지 이어졌다.
'치도', 염국이 재앙을 피하고 자원을 수송하며 외진 곳의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만든 기반 공사이다.
이런 도로는 무수히 존재하며, 전국에 있는 백여 개의 이동도시와 끝없는 황야까지 이어지고 있다.
도로는 험한 산을 지나고 구덩이에 다리를 놓고 이어진다. 길가에 설치된 보급소는 마치 균형 잡힌 대나무 마디처럼 도로가 이어진 모든 곳을 향해 생명력을 전달하고 있었다.
신이 이 망망한 불모지를 버렸다면, 인간은 그곳에 새로운 혈관을 깔아주는 걸 선택했다.
세상은 바뀌지 않겠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 해야 한다.
집을 떠난 뒤에도 가끔 치도 공사팀을 만났어. 근데 도로는 만들어서 뭐 해?
이동도시처럼 여기저기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재앙이 닥치면 하루아침에 다 망가지는 거 아니야?
이동도시가 닿지 않는 곳은 모두 이 도로에 의지해야 하니까.
망가지면 다시 만들면 돼. 이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니까 물력을 아낄 순 없어.
하지만 누군가 계속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나 기억하는 사람은 매우 적어.
얼마 전, 재앙이 이 산길을 지나 옥문으로 향하면서 옥문에 적지 않은 피해를 줬지만, 그와 동시에 영웅의 미담까지 생겨났다.
그러나 도시에서 멀고 사상자도 파손된 건물도 없는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금, 이곳에는 공사팀만 남아 분주히 이름 없는 치도를 수리하고 있다.
이 길을 따라 쭉 서쪽으로 가면 옥문이라던데, 누나는 옥문에 가 봤어?
그래.
전에 그 녀석들이랑 같이 있을 때, 사람을 모아 옥문에 가서 크게 한탕 한댔어. 그런데 난 무공도 형편없고 싸움도 못 해서 안 데려갔지.
다행이야, 안 가길 잘했어.
거기는 어떤 곳이야? 무공이 대단한 영걸이 많이 있다거나, 무시무시한 군대랑 무기가 많아?
아니…… 평범하게 일하고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이 더 많아.
옥문은 사막을 달리기 때문에 일 년 내내 모래바람과 함께해. 그런 곳에서 사는 게 어디 쉽겠어?
난 힘든 건 상관없어. 대단한 일을 할 수만 있다면…… 이런 두메산골에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 나아.
아무튼 내 뜻은 변하지 않아…… 일단 누나 말대로 집에 갈게. 만반의 준비를 마치면 이 몸은 다시 산을 떠난다 이거야!
그리고 맹세할게. 다음에 여기 서 있을 때 나 방돌쇠는 널리 명성을…… 아니지, 천하에 명성을 날린 협객이 되어있을 거야!
일단 사람 행실부터나 해. '악명'을 떨쳤다간 내가 돌아와서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아, 진짜, 꼭 초를 친다니까……
이 산만 지나면 모선 마을이야.
여기부터는 내가 길을 알아.
아침햇살이 산기슭의 안개를 뚫고 내리비췄고, 몇 가닥 밥 짓는 연기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먼 산꼭대기에는 눈이 뒤덮여 아직 녹지 않았고, 산자락에는 드문드문 밭이 보였다.
밭갈이 도중 폭우를 맞은 것일까, 부드러운 흙으로 일궈진 논두렁은 마치 채 굳기도 전에 물에 휩쓸린 것처럼 어지럽혀졌다.
아직 갈아엎지 않은 땅은 흙이 더 굳어져, 지난 모작의 밀짚이 고개를 축 늘어트리고 있었다.
3월 말의 춘분, 농사짓기에 바쁜 시기다.
밭을 일구던 사람은 손에 든 쟁기를 내려놓고 몸을 뻗으며 허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드디어 해가 떴네. 햇살이 좋은 걸 보니 오늘은 좋은 날이 되겠군.
얼른 밭을 다시 갈아야지……
너?!
돌쇠……? 너, 돌쇠구나!
이야, 대원 아저씨잖아? 맞아, 이 몸이 돌아왔어!
왜 그렇게 쳐다봐? 그냥 실수로 비료를 아저씨네 버든비스트 여물통에 넣은 것뿐이잖아. 3년이나 지났는데 설마 아직도 원망하고 있었어?
너…… 살아 있었냐?
당연히 살아있지.
그나저나, 아저씨는 3년 만에 등이 더 굽었네.
세상에…… 큰일이다!
얼른 촌장님께 알려야 해!
봤지? 마을 사람들은 날 미워한다니까.
그것보다 널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
대체 나쁜 짓을 얼마나 했길래 사람들이 널 보고 기겁하는 거야?
그건 누가 먼저 건드렸는지 따져 봐야지.
어딜 가나 다 똑같아. 사람들은 가장 만만한 상대를 골라서 괴롭히니까…… 이렇게 돌아온 이상 나도 이제 안 무서워!
……
뭘 그렇게 봐, 이렇게 가난한 마을은 처음이야?
넌 아직 못 가본 곳이 많아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쳇.
하지만 토지신 절간을 마을 입구에 세운 건 처음 보네.
옆에 왜 새 무덤이 있는 거지?
사람 죽은 게 뭐 놀랄 일인가.
그래도 어느 집인지, 왜 하필 절간 옆에 묻었을까?
뭐, 됐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묻혔으니 아마도 마을 사람이겠지.
죽은 것도 나쁘지 않아. 더는 고생할 일 없으니까.
소년은 무덤을 향해 몸을 굽혀 절했다. 말은 대수롭지 않게 했으나, 절할 때는 꽤 진지했다.
우리 집은 거의 다 왔어.
……
왜 안 가?
그게……
……아니다. 어차피 피할 수도 없고, 나도 무섭지 않아.
아빠, 나 왔어.
아주 작은 오두막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잡동사니가 잔뜩 있었지만, 그래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소년은 부뚜막에 남아 있는 밥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듯했다.
이상하네, 집에 물건은 그대로인데 왜 아무도 없지?
밭에 나갔나…… 가서 찾아봐야겠다.
아빠…… 아빠?
어디 갔지……
저 녀석 잡아라, 놓치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