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히어로 증서

히어로 증서

오퍼레이터 레코드브릿지

우연히 손으로 그린 만화를 보게 된 포푸카는 본의 아니게 스팟의 과거를 건드린다.

등장 오퍼레이터: 스팟, 포푸카, 미드나이트, 오키드, 캐터펄트


포푸카

스팟 오빠.

포푸카

스팟 오빠, 만화책 돌려주러 왔어.

포푸카

어, 문이 잠기지 않았네…… 스팟 오빠, 안에 있어?

포푸카

포푸카가 만화책을 직접 돌려주러 왔어!

포푸카

흑……

포푸카

으, 으앗. 포푸카가 책장을 쓰러뜨렸어?!

포푸카

책장을 세워 놔야 해……


포푸카

됐다!

포푸카

그런데 이 많은 만화책이 다 떨어졌는데…… 어디에 꽂아야 할지 모르겠네…… 스팟 오빠가 화내려나?

포푸카

일단 제목이 같은 책끼리 모아 놓고 스팟 오빠를 기다리자.

포푸카

어? 이 책은 왜 제목이 없지?

포푸카는 책더미에서 다른 책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가죽 커버 노트를 집어 들었다. 단색 표지에는 먼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제목도, 삽화도, 심지어 글자조차 쓰여 있지 않았다.

포푸카

이 만화책은 어느 더미에 놓아야 할까?

포푸카

……

포푸카가 책장을 펼치자 약간 누렇게 변색된 종이가 보였다. 그 위에는 만화가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 선들은 인쇄된 게 아니라 누군가 직접 그린 것 같았다.

전문적인 솜씨는 아닌 것 같지만 내용은 아무렇게나 끄적인 정도가 아니었다.


병사

아이고 내 무릎, 내 다리……

병사

보르누, 아버지께 말해서 우리 좀 편한 팀장 밑으로 보내달라고 하면 안 돼? 우리랑 여기서 한 시간 동안 포복 전진하는 게 재밌어?

청년

해봤는데 소용없었어.


포푸카

이 보르누라는 사람, 생긴 게 스팟 오빠랑 닮았어!

포푸카

포푸카는 스팟 오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어…… 베, 보……?

포푸카

맞아, 부카르 보르누야!

포푸카

앗, 여기, 선이 테두리 밖으로 나갔어……


상관

열중쉬어, 차렷!

상관

네놈들 꼴 좀 봐라. 건들건들해서는, 제대로 서 있는 놈이 없군! 전선에 있는 전우들은 매일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네놈들은 뭘 하고 있지?

상관

감히 만화책을 가져다 본 놈도 있었나……

상관

……보르누 준장님!

아버지

열중쉬어.

아버지

누가 만화를 봤지?

상관

네, 부카르 보르누입니다!


포푸카가 페이지를 넘기자 줌아웃 된 장면이 페이지 전체에 그려져 있었다.

병사 보르누가 숙소에 몰래 숨겼다가 발각된 만화책이 캠프 중앙에 쌓여 있었다.

노트에 만화를 그린 사람은 종이가 찢어질 듯한 묵직한 터치로 만화의 표지와 제목, 권수를 꼼꼼히 적어 놓았다.

반면 주변 사람들은 너무 간단히 스케치 되어 허상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버지

모두 쭈그려 앉는다…… 실시!

아버지

보르누, 넌 앉을 필요 없다.

아버지

이리 와서 이 만화책에 나오는 대사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읽도록. 네가 다 읽어야 저들도 일어날 수 있다.

청년

보르누 준장님, 그 만화책은 제 것입니다. 제가 쭈그려 앉아 읽겠습니다……

아버지

네가 읽지 않으면 저들은 내일까지 저러고 있게 될 거다.

아버지

이런 허접한 만화책에도 나와 있을 테다. 사람이라면 최소한 자기가 저지른 짓에 대해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걸.

아버지

그것조차 못하면서 무슨 영웅 만화를 본다는 거지? 영웅이 되고 싶다고? 가당키나 해?

청년이 만화책을 다 읽는 데는 두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약간의 동정심을 느끼던 병사들도 쭈그려 앉은 채 두 시간이 지나가자 원망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포푸카

만화를 보는 게 그렇게 나쁜 일인가?

포푸카

아니야, 분명 보르누의 아버지…… 스팟 오빠의 아버지가 오해한 걸 거야!


그 사건 이후 팀 전체가 전선으로 보내졌다.

병사 대부분이 아들에게 화가 난 보르누 준장의 결정이라고 생각했기에 병사 보르누의 입장은 점점 더 난처해졌다.

결국 병사 보르누는 도망치기로 했다.

그는 캠프에서 빠져나오기도 전에 순찰병에게 잡혔고 바로 그때, 적군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적군의 매서운 공격에 사기가 꺾인 군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병사

이제 여긴 아무도 없으니 흩어져서 도망가자.

청년

……

병사

표정이 왜 그래? 설마 이제서야 장군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거야?

청년

아버지가 원망스러워. 아버진 내가 절대 영웅이 될 수 없을 거라며 나를 모욕하고 깎아내렸어.

병사

그런데 뭘 망설이는 거야?

청년

하지만 매번 아버지 뜻대로 하고 싶지 않아.

병사

어디 아파?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청년

내가 정말 전장에서 도망쳐버리면 난 자연스럽게 탈영병이 될 거고, 그럼 아버진 평생 날 탈영병이라고 부르며 모욕할 거야!

병사

그렇겠지, 그래서? 설마 진짜 영웅이라도 되려는 거야? 그전에 네 목숨부터 지키라고!

청년

나도 알아, 내가 영웅이 될 수 없다는 거.

청년

하지만 내가 죽으면 그 늙은이는 후회할지도 모르지. 후회하지 않는다 해도 할 수 없고. 여기서 살아남으면 나를 비웃었던 말을 모두 그대로 돌려줄 거야!

청년

도망가고 싶으면 너나 도망가. 이건 내 일이고, 우리 집안 문제야.


청년은 적군에 정면으로 대항할 힘이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사방에 흩어진 패잔병을 모으는 일뿐이었다.

패잔병들이 모이고 모여 수십 명으로 이루어진 팀이 꾸려졌다.

적군은 당연히 그들을 노렸지만, 청년은 버티기로 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방패를 보고 더 많은 사람이 그의 곁에 모였다.

가장 가까운 아군 캠프로 철수했을 땐 200명 가까운 패잔병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상관

보르누, 앞으로!

상관

지난 전투에서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보르누 병사에게 2급 영웅 병사 훈장을 수여한다!

청년

……

상관

보르누 병사, 표창장 내용을 직접 읽어보도록!

청년은 묵직한 훈장을 목에 건 채 표창장을 들고 있었다.

청년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눌렀다. 낭독하기 전 단상 아래 사람들을 훑어보았으나 아버지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과 시원한 마음이 뒤섞인 채로 표창장을 읽기 시작했다.

청년

……이에 특별히 훈장을 수여한다.

청년

준장, 보르누.

청년

보르누……?!


포푸카

흐아앙……

포푸카

포푸카는 스팟 오빠가 아버지와 화해할 줄 알았어!

포푸카는 눈물을 훔치며 페이지를 넘겼지만 눈에 들어온 건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지뿐이었다.

포푸카

뒤엔 왜 없지?

스팟

포푸카, 뭘 보고 있는 거야?

포푸카

으앗!

포푸카

미안해, 스팟 오빠. 책장을 일부러 넘어뜨린 건 아니야……

스팟

그래, 당연히 일부러 그러진 않았겠지.

스팟

잠깐, 지금 뭘 보고 있는……

포푸카

포푸카는 이 만화가 정말 좋아!

포푸카

이 만화, 스팟 오빠가 겪었던 일을 그린 거지? 스팟 오빠가 이렇게 대단한지 포푸카는 몰랐어!

스팟

그런 게 아니라……

“그거 내가 그린 거 아니야. 주인공도 내가 아니고.”

왠지 모르겠지만, 스팟은 입안에 맴돌던 말을 끝내 털어놓지 못했다.

스팟

포푸카, 이제 잘 시간이야. 오키드에게 가렴.

포푸카

응! 내일 정기 훈련도 있고, 오키드 언니가 훈련 후에 회식도 한댔어!

스팟

네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잊고 있었을 거야.

포푸카

……스팟 오빠, 화났어?

스팟

아니야. 미드나이트에게도 화낸 적 없잖아.

스팟

얼른 가.

노트를 집어 들고 잠시 머뭇거리던 스팟은 곧 뒤돌아 바닥에 떨어진 만화책들을 정리했다.

너무 잘 알고 있는 만화들이라 뒷면의 삽화만 보고도 어느 작가의 어떤 작품 몇 권째 만화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만화책을 다 정리하는 데에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리를 마친 스팟은 가죽 커버 노트에 다시 눈을 돌렸다.

스팟

안 되겠다. 포푸카에게 가서 방금 본 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말해야겠어.

스팟

영웅은 무슨. 마음 접은 지가 언젠데.

스팟

하지만……

스팟

적어도 포푸카 같은 아이들 앞에서라도 영웅이 될 수 있다면……

스팟

……불가능해. 난 그런 깜냥이 안 돼.

스팟

하지만……

스팟

……


포푸카

회식, 회식!

오키드

그래, 회식이야.

오키드

(한숨 소리)

오키드

다들 2차 실전 훈련을 잘해줘서 다행이야. 안 그러면 회식도 물 건너갔을 테니까.

캐터펄트

후훗, 도베르만 교관한테 혼나지 않으려고 젖 먹던 힘까지 짜냈다고!

오키드

그래?

캐터펄트

으음…… 아마 70~80% 정도?

미드나이트

솔직히 말해서 오늘 정기 훈련은 다들 완벽히 해냈어.

미드나이트

하지만 굳이 잘한 사람을 뽑자면 사양하는 것도 도리는 아닌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이 나를 추천해야 할 것 같아!

A6팀 팀원들

……

미드나이트

이런, 이렇게 냉담한 반응이라니 가슴이 아프군.

미드나이트

특히 스팟 너, 완벽했던 내 전투에 대해 뭔가하고 싶은 말 없어?

스팟

응?

스팟

딴생각을 좀 하느라, 뭐라고 했지?

미드나이트

하여튼 쌀쌀맞……

오키드

됐어, 미드나이트, 이제 그만.

미드나이트

(우아하게 어깨를 으쓱인다)

캐터펄트

솔직히 오늘 가장 훌륭했던 건 스팟이었어.

포푸카

맞아!

포푸카

오늘 첫 실전에서는 스팟 오빠가 도베르만 교관과 일대일로 싸울 것처럼 이상하게 행동해서 포푸카는 좀 걱정했거든……

포푸카

하지만 두 번째 실전에서는 완전히 달랐어! 스팟 오빠가 제때 치료해줬을 뿐만 아니라 포푸카가 도베르만 교관의 공격을 막을 수 있도록 도와줬어!

캐터펄트

그게 관건이었지.

캐터펄트

도베르만 교관이 공격하는 각도를 보고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스팟이 순간 이동하듯 그 위치까지 갈 줄은 몰랐어.

캐터펄트

스팟이 제때 자리를 채워주지 않았다면, 도베르만 교관은 분명 포푸카를 명중시킨 후 나에게 달려들었을 거야. 그랬다면 우린 무너졌겠지.

미드나이트

그건 그래!

미드나이트

스팟이 첫 번째 실전에선 영웅의 기개를, 두 번째 실전에선 민첩한 기지를 보여줬어. 하마터면 내가 인정할 뻔했지 뭐야……

오키드

미드나이트, 작작 좀 해.

오키드

스팟은 지금…… 기분이 안 좋다고.

스팟

……

스팟

결국 포푸카가 얘기한 거야?

오키드

(고개를 끄덕인다)

포푸카

왜…… 갑자기 다들 기분이 나빠진 거야?

포푸카

스팟 오빠, 포푸카가 만화에 대해 말하면 안 되는 거였어?

오키드

포푸카, 지금은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 알겠지?

캐터펄트

으음……

캐터펄트

그래서……

캐터펄트

참, 회식! 오키드 언니, 오늘 식당에 사람이 많지 않을까?

미드나이트

걱정 마. 우리 주도면밀한 오키드 씨만 있으면 식당이 아무리 붐벼도 자리 하나쯤 잡는 건 일도 아니니까, 그렇지?

오키드

……응.

포푸카

스팟 오빠, 화내지 마…… 포푸카가 잘못했어……

스팟

어제 말했잖아, 화나지 않았다고.

스팟

난 단지…… 뭐랄까,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런 거야.

포푸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스팟

그러니까…… 음……

스팟

미드나이트, 뭐든 말해 봐.

미드나이트

어? 결국 스팟 너도 내 머릿속 깊은 곳에 자리한 우물에서 영감을 찾으려는 거야?

스팟

흐음……

스팟

미안하지만 자기 머릿속에 물이 가득 찼다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봐.

스팟

포푸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은 '흐음'까지 밖에 생각하지 못했단 거고, '머릿속에 물이 가득 찼다’는 건 그냥 생각이 없다는 것과 같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포푸카

……?

스팟

식당에 도착하면 자세히 말해줄게.

포푸카

그럼 포푸카가 잘못한 건 아니야?

스팟

응.

포푸카

그럼 포푸카가 사람들에게 스팟 오빠에 대한 걸 말해줘도 돼?

오키드

포푸카……

스팟

괜찮아. 말해도 돼, 포푸카. 네가 대신 얘기해 준다면 굳이 내 입으로 말할 필요도 없겠지.


캐터펄트

스팟, 몰라봤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어?

미드나이트

패전 직전의 패잔병을 200명이나 모아 다시 부대로 돌려보냈다고?

미드나이트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전적이네.

미드나이트

이런 일이 알려지면 오히려 좋지 않나? 나라면 그 훈장을 항상 가슴에 달고 다니며 전적을 자랑했을 텐데 말이야.

스팟

훈장은 못 받았어.

미드나이트

못 받았다고요? 어떻게 그런 불찰이……

스팟

왜냐하면……

스팟이 빵을 집어 한입 베어 물었다.

빵을 힘껏 물어뜯으면 약간의 용기가 생길 거라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턱에 힘을 주는 방식은 평소와 다름없었고, 씹는 것부터 삼키는 것까지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스팟

패잔병을 모은 게 내가 아니기 때문이야.

스팟

그날 밤, 적군의 공격을 받은 직후 내 주위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어.

스팟

난 탈출할 기회를 잡았고 포위망을 벗어났어. 그리고……

스팟은 의식적으로 말을 멈추고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그는 목이 멜까 봐 겁이 났다. 그러나 그건 괜한 걱정이었다.

그는 그때의 일을 영원히 묻어두려 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하루의 대부분을 함께하는 동료들에게 뭔가를 숨긴다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팟

반항심도 없었고, 패잔병도 모으지 않았어. 그러니 당연히 훈장 수여식도 없었던 거지.

스팟

난 도망쳤어. 그게 다야.

스팟

전 아군의 미움을 받던 병사에게 도망은 모두의 기대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자신과도 어울리는 행동이었지. 이런 걸 두고 적재적소라고 하는 거지.

스팟

내가 나서서 영웅인 척했다면 그거야말로 말이 안 되는 거였어.

오키드

스팟,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스팟

괜찮아.

스팟

오키드, 너도 내가 그런 영웅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포푸카가 말하지 못 하게 말린 거 아니야?

오키드

……맞아.

긴 침묵이 흘렀다.

A6팀에게 이런 침묵은 꽤 드문 일이었다.

스팟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포푸카는 약간 실망한 듯했고, 미드나이트는 방정맞은 표정이었다. 오키드는 살짝 긴장한 듯 스푼으로 커피를 계속 휘젓고 있었고, 캐터펄트는 여전히 엉거주춤한 상태였다.

이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스팟에 대해 순수한 관심이 있다는 점이었다.

오키드

그리고 나서…… 포푸카가 말한 그 만화를 그렸던 거야?

스팟

맞아.

스팟

그 부대는 정말 바보 같았어. 당시 나는 그 노인네 지시에 따라 순순히 벌을 받았지. 그 당시엔 미드나이트보다 머릿속에 물이 더 찬 상태였거든.

스팟

장교들은 병사들을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어. 매달 과도한 훈련으로 병사들이 쓰러졌고, 나중에는 아미르 간의 무의미한 마찰로 피를 보기도 했지……

스팟

그 시절, 좋은 점이 있었다면 그건 더운 날씨 정도였어. 높은 기온으로 내 머릿속 물이 다 마른 덕분에 결국 도망칠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스팟

하지만……

스팟

내가 도망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스팟

오랫동안 이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고, 결국 자신을 미화한 낙서를 그렸던 거야.

스팟

만화를 그릴 땐, 그때 도망치지 않았다면 노인네가 날 다시 보지 않았을까 하는 환상에 젖곤 했지.

미드나이트

……스팟, 솔직히 너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인데,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오키드

미드나이트!

스팟

괜찮으니까 말하게 둬.

미드나이트

엄청 오래 전에 내가 동야의 마왕이라는 이름으로 업계를 종횡무진하고 있을 때, 열심히 일하던 동료가 있었어. 신랄한 말투로 유명한 녀석이었지……

스팟

이야기는 이제 겨우 시작인데 벌써 불길한 예감이 들어.

스팟

만약 그 동료가 어떤 이유로 극동의 부대에 들어갔는데 적응하지 못했다면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겠는걸.

미드나이트

(멋쩍게 웃는다)

스팟

하아.

스팟

네 이야기는 한눈에 결말까지 볼 수 있도록 뻔하지만 적어도 논지 하나는 정확하다니까.

스팟

만약 미드나이트 네가 자타공인 영웅이 되는 날이 오게 된다면 난 인간의 이성에 깊이 실망할 것 같아.

스팟

하지만 내가 누구나 인정하는 영웅이 되는 날이 온다면 난 어쩌면 인간의 어리석음에 미쳐버릴 거야.

스팟

결국 난 그저 내게 어울리지 않는 꿈을 가족에게 세뇌당했을 뿐이야.

스팟

그래서 이 허접한 만화도 훈장을 받고 끝난 거지. 내 빈곤한 상상력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최선이었거든.

스팟

이후 영웅이 된 보르누가 어떻게 그 영웅적인 면모를 이어갈지 도저히 상상해 낼 수 없었어. 만화는 결국 자가당착의 산물이니까.

포푸카

포푸카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오키드

괜찮아. 포푸카가 크면 이해하게 될 거야.

포푸카

그런데 포푸카가 잘못해서 스팟 오빠가 말하고 싶지 않은 걸 말하게 만든 거야?

스팟

절대 아니야.

스팟

사실은 포푸카 덕분에……

스팟

……

스팟

(머리를 긁적인다)

스팟

(망설이는 눈빛)

스팟

(어색하게 목을 가다듬는다)

포푸카

……스팟 오빠, 어디 아파?

미드나이트

이건 아픈 게 아니야, 포푸카.

포푸카

하지만 스팟 오빠가 불편해 보이는데……

미드나이트

지금 태어나서부터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오글거리는 멘트를 준비하는 중일걸……

오키드

……미드나이트, 잘 생각해라.

미드나이트

……아니,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건 엄청 민망한 일이거든.

미드나이트

나만큼이나 똑똑해도 첫 손님을 맞이하는 건 허둥댈만한 일이니까.

미드나이트

맞지, 스팟?

스팟

……

스팟

미드나이트, 내일 일대일 훈련이나 할까?

미드나이트

하하, 좋아.

스팟

그럼, 하던 얘기를 마저 할게……

스팟

……포푸카 덕분에 깨달았어……

스팟

(나직이) ……가장 믿는 사람에게 이런 우스꽝스러운 '영웅 행적'을 털어놓는 게 숨기는 것보다 훨씬 편하다는 사실을.

미드나이트

아, 알겠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미 가장 믿는 사람이라는 거지, 스팟?

오키드

스팟, 쟤를 때리고 싶으면 때려도 돼.

미드나이트

오키드 씨……

스팟

뭐, 됐어.

스팟

미드나이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괘씸하긴 하지만, 그래도 없는 말을 지어내는 건 아니니까…… 괜찮아.

캐터펄트

그럼 됐어.

캐터펄트

스팟이 오늘 들려준 이야기에 건배하자. 다들 건배!

A6팀 팀원들

건배!

스팟

자, 가짜 영웅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여기까지……

포푸카

그래도 스팟 오빠는 영웅이야!

스팟

응?

포푸카

포푸카가 공격을 막을 수 있게 스팟 오빠가 도와줘서 모두를 지키고 회식도 할 수 있는 거니까 스팟 오빠는 영웅이 맞아!

포푸카

포푸카가 스팟 오빠에게 훈장 수여식을 해줄래!

A6팀 팀원들

뭐?!

포푸카

훈장 수여식에는 포푸카가 있어야 해. 오키드 언니랑 캐터펄트 언니, 미드나이트 오빠까지 하면……

포푸카

힝, 안돼…… 사람이 너무 적은데!

포푸카

포푸카가 더 생각해볼게…… 아, 맞다. 버블도 있었지!

오키드

저기, 포푸카?

포푸카

샤마르 언니랑 스즈란 언니도……

스팟

오키드, 캐터펄트. 와서 좀 도와줘. 왠지 오늘 험난할 것 같은 예감이 드네.

미드나이트

그럼 나는?

스팟

식당 매니저에게 포푸카를 부추겨 소란을 피우게 한 게 너라고 말할 거야.

스팟

넌 숙소로 돌아가서 줄어들 월급 때문에 슬퍼할 권리 정도는 있다고 생각해.


스팟

누구야?

미드나이트

나야, 스팟. 줄 게 있어서 왔어.

미드나이트

받아. 포푸카가 주는 '영웅 증서'야.

스팟

영웅 증서??

스팟

포푸카에게 훈장 수여식을 포기하라고 입이 닳도록 설득했었잖아?

미드나이트

숙소에 돌아간 후 포푸카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나 봐.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어.

미드나이트

어쨌든 포푸카가 직접 그린 영웅 증서야. 어서 받아.

미드나이트

우리한테 증서에 사인까지 하라고 하더라니까.

스팟

그래서 했어?

미드나이트

네 사인만 남았어. 너만 사인하면 넌 우리 A6팀 전원이 인정하는 영웅이 되는 거야.

스팟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영웅 증서'에는 포푸카가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형식적인 '표창장 문구'가 쓰여 있었고, 테두리에는 조잡한 그림 장식과 레이스가 달려 있었다.

스팟은 '표창장'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두꺼운 촉감의 종이 최하단에는 네 명의 사인이 있었다.

가슴이 따뜻해졌다.

미드나이트

어때, 사인이 눈에 띄도록 내 고급 만년필을 빌려줄까?

스팟

그럴 필요 없어.

스팟은 사인하지 않고, 서랍에서 예쁜 액자를 하나 꺼내 '영웅 증서'를 넣었다.

그러고는 침대 머리맡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액자를 놓았다.

미드나이트

안 돼, 스팟. 네가 사인하지 않으면 포푸카가 소란을 피울 거야.

스팟

포푸카가 소란 피우는 것보다 포푸카가 소란을 피우면 오키드가 널 찾아와 귀찮게 할까 봐 걱정하는 건 아니고?

미드나이트

정확한 판단이었어!

스팟

입에 발린 말을 해도 소용없어. 사인 안 할 거니까.

스팟

영웅이 되는 것보다 지금의 생활이 나에겐 더 잘 어울려.

스팟

뭐야, 왜 아무 말도 안 해?

미드나이트

감동적이어서. 결국 내 진실한 마음이 스팟 너의 그 얼음장 같은 마음을 녹인 거잖아……

스팟

……미드나이트,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어. 영웅이 되는 일도 특별히 어렵진 않은 것 같아.

스팟

다음에 너와 임무를 나갈 일이 있으면 몰래 성질 나쁜 여자를 배정해야겠어. 네가 수작을 좀 걸게 말이야.

스팟

네가 흠씬 두들겨 맞고 병원에 보름쯤 누워 있으면 난 아마 A6팀의 영웅이 되어 있을 거야.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크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