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사랑하는 랜들

사랑하는 랜들

오퍼레이터 레코드브릿지

라이타니엔에서 유학하는 동안 랜들은 부모님의 신분을 도용하여 쓰인 편지를 받았다. 그는 자신을 놀리는 아마추어들에게 답례로 진짜 장난이 무엇인지 알려주고자 한다……


사랑하는 랜들, 네가 라테라노를 떠난 뒤로, 나와 네 아버지 모두 너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었구나.

물론 바쁘고 고된 일이 우리가 기꺼이 마주해야 할 현실이긴 해도, 그게 정말 중요한 것을 소홀히 하게 되는 구실이 되어선 안 된단다.

어쩌면 네가 홧김에 부탁한 걸 그렇게 쉽게 허락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널 이렇게 먼 나라에 혼자 공부하라고 보냈다니. 이동하는 데 드는 시간이 우리 업무를 반은 끝낼 수 있을 정도였단 걸, 이번에 직접 겪어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단다.

그래, 우린 널 보러 라이타니엔으로 이미 가고 있는 중이란다.

이 편지를 네가 받을 즈음이면 우린 아마 도착했을 테니, 굳이 답장할 필요는 없단다. 우리가 묵는 여관의 주소를 편지에 적어두었으니, 널 만나길 기대하고 있으마.

우리가 네게 냉담하게 대했던 것 때문에 아직도 화가 나 있든 아니든, 우린 그곳에서 널 기다리고 있을 거란다.


전달자

랜들 호프스태터 학생, 학생 편지야.

랜들

이거 참 신기하네. 나한테 편지를 쓸만한 친구가 있던 기억은 없는데.

전달자

사람 마음이란 건 며칠 전에 내린 소나기처럼 변덕스러운 법이지. 그 소나기 때문에 피해를 본 건 편지들이지만. 보낸 사람 정보가 빗물에 번지는 바람에 누가 보낸 건지 거의 알아볼 수 없긴 한데, 착오가 없길 바라야지 뭐.

랜들

……

랜들

문제없어, 먼 고향에 있는 어머니가 보낸 편지니까 말이야. 고마워.

전달자

그렇다면 다행이네. 좋은 하루 보내.


건방진 실습생

페인! 네게 맡긴 일은 다 처리한 거야?

비웃는 실습생

저 우왕좌왕하는 모습 좀 봐. 정말 꼴사납네.

페인

끄…… 끝냈어요, 빅터 도련님.

빅터

봐, 내가 뭐랬어, 브리트니? 페인은 우리의 '우정'을 저버리지 않을 거라고 했지. 그래서, 걔 반응은 어땠어?

페인

글쎄요…… 랜들은 제가 지어낸 말들을 딱히 믿지 않는 것 같던데요…… 아니면 그냥……

빅터

그럼 네가 큰일 날 텐데, 페인.

페인

음……

빅터

혼자 라이타니엔에 와서 공부하는 건 쉽지 않지. 난 네 아츠 재능과 성실한 태도가 마음에 들어. 학교의 장학금은 지식을 갈망하는 모든 실습생이 받아야 하는 보상이긴 하지만…

빅터

모든 게 정리되기 전까지는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는 법이지.

빅터

거기 선정되려면 엄격한 자격 심사를 거쳐야 해. 네가 기말고사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하는 거야 어렵지 않겠지만, 최종적으로는 위원회의 허가를 받아야 하지.

페인

빅터 도련님…… 도련님의 숙부께서 위원회에 계시죠……

브리트니

장학생 명단은 일주일 뒤에나 공식 발표된다던데.

페인

제가…… 어떻게든 랜들이 약속 장소에 나오게 할게요.

빅터

바로 그거야, 페인.


랜들

그렇게 책을 높이 들고 다닐 거면 조심해야지.

페인

미, 미안해, 랜들.

랜들

나를 알아?

페인

아…… 아마도 같은 교양 수업을 들었을 거야.

랜들

맞네, 페인 선배구나. 기존 아츠 유닛과 호환되어야 할 오리지늄 에너지 변환 유형에 대한 선배의 견해가 너무 참신해서, 에드윈 교수님을 엄청 화나게 했지.

페인

크흠…… 다행히 심사는 공정하게 해 주셨어.

랜들

그에 비하면 난 운이 별로 좋지 못했지. 그나마 다행인 건, 이론이 애초에 내가 좋아하는 분야가 아니라는 거야, 5~60년이 지나도 이론의 개념들은 크게 발전하지 않을 거 같거든.

랜들

독물학 수업은 다른 별관이야. 다음에 봐, 선배.


랜들

페인 선배, 어째 요즘 들어 정말 자주 보는 것 같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지 의심이 되기 시작하는데?

페인

……!

랜들

하하, 언제 봐도 반응이 참 재밌다니까.

랜들

타지에서 대화가 잘 통하는 친구를 만나는 건 정말 쉽지 않아, 더군다나 우린 둘 다 유학생이고.

페인

난 집을 떠난 지 오래돼서 가족들의 모습도 잘 기억이 안 나. 가족들도…… 나한테 편지를 거의 보내지도 않거든.

랜들

편지라…… 최근에 어머니에게 편지를 받았는데 말이야.

페인

그 편지 어땠어? 아니…… 내 말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랜들

글쎄, 날 보러 오고 싶다는데, 정작 내가 가족들을 만나고 싶은지 잘 모르겠어.

페인

꼭 보러 가야지! 흠…… 가족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항상 널 걱정할 테니까.

랜들

선배는 내가 그 약속 장소에 갔으면 하는 거야?

페인

아니! 이건 전적으로 네 선택인 거지!

랜들

그럼 좀 더 생각해 보고…… 며칠 후에나 답장을 보내는 게 좋겠어.

페인

랜들, 너…… 가족들을 만나러 가긴 할 거지?

랜들

어째 선배가 나보다 더 급한 거 같네. 이걸 전적으로 내 선택이라고 말한 건 선배지 않아?

페인

망했다…… 만약 거절하면…… 빅터 도련님께는 어떻게 설명해야 되냐고!


랜들

전달자 씨!

전달자

랜들 학생, 안녕.

전달자

편지에 무슨 문제라도 있니?

랜들

아니, 어머니의 안부를 전해줘서 고마워. 그냥 오랫동안 가족들과 연락을 안 했더니, 마음속 얘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네. 어머니는 답장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전달자

이해해. 원래 고향을 떠나 먼 길에 오른 사람은 고향에 가까워질수록 도리어 복잡한 마음이 드는 법이지. 랜들 학생의 이 편지는 내가 책임지고 전달해 줄게. 다만…… 원래 주소로 보낼 수는 없어.

랜들

부모님이 머무는 주소를 남겼으니, 거기로 보내면 될 거야.

전달자

알겠어, 가족과 즐거운 만남이 되길 빌게.

랜들

고마워, 분명 그럴 거야.

전달자

휴, 외지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은 참 고생이 많아. 하지만 뭐, 내 일도 만만치는 않지. 다음은……

페인

저, 저기 잠깐만요!

전달자

오, 페인이잖아!

전달자

왜, 오늘 드디어 편지를 부치기로 한 거야? 가족들과 다시 만나는 두 유학생이라니, 축하해!

페인

아뇨, 전 편지를 부치러 온 건 아니고…… 저기, 랜들의 편지를 제가 대신 전해드리면 안 될까요?

전달자

그건 안돼. 남한테 일을 대신 시키고, 어떻게 맘 편히 월급을 받겠어!

페인

괜찮아요, 전달자 씨. 제가 바흐 구 쪽은 잘 알고 있으니까 실수할 일은 없을 거예요.

전달자

편지에 적힌 주소를 알고 있어?

페인

음…… 저…… 랜들은 제 제일 친한 친구예요! 랜들의 부모님께선 이미 라이타니엔에 오셨는데, 어떤…… 맞아…… 어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다른 숙소로 옮기셨어요.

페인

어제 길에서 그분들을 우연히 뵈었는데, 지금 그 주소로 보내면 랜들의 간절하고 진심 어린 편지가 전달되지 못할 수도 있어요……

전달자

잠깐만, 페인, 너 너무 긴장했는데.

전달자

알겠어. 랜들 학생은 페인에게 정말 중요한 친구구나. 그래서 너도 랜들과 가족 간의 만남이 혹시라도 잘못되지 않길 바라는 거고?

페인

네……

전달자

착하네. 그럼 이 편지를 맡길게. 대신 다음엔 내가 페인을 대신해서, 페인이 가족에게 쓴 편지를 전달해 줄게.

전달자

우리가 처음 만난 지 벌써 3년이나 지났네. 너도 이젠 그만 망설이렴.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부모는 자식의 편지를 받으면 항상 기뻐하는 법이니 말이야.

페인

감사합니다, 전달자 씨. 저도…… 생각해 볼게요.

페인

제발…… 제발 거절하면 안 되는데……

페인

다, 다행이야! 내일 저녁 제시간에 도착할 테니, 일단 빅터 도련님이랑 브리트니 아가씨께 알려서 준비하게 해야……

페인

랜들도 가족과의 사이가 그리 좋진 않았구나. 연구…… 하, 당연히 연구 때문이겠지……

페인

“이번 만남에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아 줘. 물론 와줘서 기쁘지만, 라이타니엔의 낯선 거리 풍경이 끊임없이 내게 상기시켜 주거든, 난 여전히 혼자라는 걸 말이야.”

페인

그래, 랜들도 혼자야. 하지만……

모든 게 정리되기 전까지는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잖아……

최종적으로 위원회의 허가도 받아야 하고……

페인

빅터 도련님이 날 가만두지 않을 거야. 반드시 해내야만 해, 난……

페인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빅터

시간 거의 다 됐어, 브리트니.

브리트니

정말이지 사람을 잘 다루네.

빅터

우리의 새 장난감에게 약간의 존중은 보여줘야지.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빅터

정말 랜들이 오는 거 맞지? 우리의 시간은 매우 귀중하다고. 만약에 약속한 시간이 지나도 모습을 비추지 않으면……

페인

저는 장학금, 그리고 1년밖에 남지 않은 평화로운 학교생활과 작별해야겠죠.

페인

알고 있어요, 빅터 도련님. 두 번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빅터

……

브리트니

며칠 못 본 사이에 꽤나 까칠해졌네, 근데 지금 모습이 좀 더 봐줄 만한걸.

빅터

쉿, 누가 온다. 페인, 네 아츠 유닛 준비해. 내 신호 듣고……

빅터

멍청아,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랜들

푸가 거리 2번지…… 여기가 맞나?

페인

혹시 랜들 호프스태터 학생 맞나요?

랜들

네, 접니다.

페인

전 바흐 구의 전달자입니다. 어떤 산크타 부부의 부탁을 받고 여기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빅터

언제부터 표정 하나 안 바꾸고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된 거야? 수술비라, 예상 밖이긴 한데, 그 녀석도 믿어줘서 다행이네.

페인

유학생은 고향 소식을 제때 받기 어렵거든요. 설령 거짓말이라 한들 그 짧은 시간 내에 확인할 방법은 없죠. 반대로, 우리의 그리움이나 걱정, 후회…… 역시 가족들에게도 알릴 수 없긴 하지만요.

페인

그의 약점을 붙잡아야만, 그가 앞으로 몇 년 동안 가장 '충성스러운' 당신의 친구가 되어줄 테니까요.

빅터

음…… 맞는 말이야.

빅터

저 녀석이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비싼 물건이 그 소포 안에 들어 있는 거야? 만약 진짜로 저 녀석 부모가 재수 없이 재앙을 당했다 해도, 이걸로는 병원비가 턱도 없이 부족하겠는데..

브리트니

발육도 시원찮은 산크타 꼬맹이가 얼마나 값어치 있는 걸 내놓을 수 있겠어? 차라리 그 녀석 몸에다 새로운 아츠나 시험해 보는 게 낫지.

페인

랜들의 부모님은 라테라노의 총기 학자세요. 두 분 모두 정부의 지원을 받는 연구소 소속이니, 집안도 분명 좋을 겁니다.

페인

만약 그가 남긴 물건 중에 총에 대한 연구 결과가 있다면, 두 분의 아버님도 분명 기뻐하시겠죠.

브리트니

언제부터 그렇게 걔를 그렇게 잘 알게 된 거야?

빅터

페인, 3년이 지나서야 드디어 깨달았구나! 네가 내년에 졸업하는 게 아쉬워지는군, 우리의 우정이 그리워질 거야.

페인

저도요, 빅터 도련님.


빅터

뭔가 은은한 향이 나는 것 같지 않아?

브리트니

남을 속여서 얻은 게 뭐 얼마나 좋은 선물이 되겠어? 게다가 내 생일은 벌써 지났다고.

빅터

콜록…… 콜록, 콜록……

브리트니

콜록…… 지금 냄새를 맡긴 했는데, 이게 뭐지? 잠깐, 상자가 왜 비어있지? 젠장, 그 산크타가 우리를 속였어…… 빅터, 네 얼굴은 또 어쩌다 그렇게 망가진 거야?

빅터

네 얼굴은 지금 예쁜 줄 알아? 뭐야, 이상해, 내 발가락을 따라 뭔가 올라오고 있어! 아니… 내가 가라앉고 있는 건가? 지형을 바꾸는 오리지늄 아츠?

브리트니

땅이 너무 심하게 흔들리고 있어…… 나 좀 붙잡아줘, 빅터, 붙잡……이, 이게 뭐야? 초록색 점액… 내 보석 반지가…… 안 돼, 안 돼! 내 손가락이 보이지 않아! 이건 마치……

랜들

녹고 있지.

랜들

두 사람 다 내가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외로운 유학생이라고만 생각한 거 같은데, 내가 자발적으로 사람들을 피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랜들

부식, 분해, 용해. 이게 내 오리지늄 아츠이자 어릴 때부터 나와 함께한 재능이지.

랜들

이런 것들을 사람들과 공유한 적도 거의 없지만, 그렇다고 파괴와 죽음의 원리를 이해하려는 사람도 별로 없더라고. 어때, 이제 내가 두 사람의 '새 친구'가 되기에 충분하려나?

빅터

페인?

빅터

젠장! 진작 너희 같은 이방인들은 죄다 한통속이라는 걸 고려했어야 했는데. 배신자! 기다려라, 꼭 무거운 대가를 치르게 해 줄 테니까!

페인

괜한 수고하실 필요 없어요. 당신들의 짓궂은 장난에 가담한 것만으로도 이미 제게 가장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른 거니까요.


랜들

짓궂은 장난?

페인

정말로 미안해, 랜들! 네가 받은 편지…… 사실 내가 쓴 거야.

페인

너와 마찬가지로 혼자 외롭게 공부하는 유학생이, 아무리 귀족 자제들이 시켰다지만 편지까지 써가면서 널 속여서는 안 됐었는데…… 내일 약속 장소에 절대 가서는 안 돼!

랜들

가짜 편지였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

페인

뭐……라고?

랜들

도장도, 서명도, 무엇보다 라테라노 총기의 윤활유 냄새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라이타니엔으로 유학 가는 걸 선택했을 때, 두 분은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으셨거든.

랜들

부모님은 매우 기뻐하셨어. 마치 나의 선택이 두 사람의 문제를 이미 해결해 준 것처럼 말이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부모님에게는 연구야말로 가장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였으니까.

랜들

내가 라이타니엔에 왔는데도, 모든 관심을 차지하고 있던 '형'은 여전히 날 불안하게 했었지.

랜들

탐욕스럽고 무능한 경쟁자들이 나를 속여서 내 연구 비밀을 훔치려 하는데, 내가 어떻게 나를 무시하는 적들을 가만히 놔둘 수 있겠어?

랜들

대부분의 학생들은 정교하고 정밀한 오리지늄 아츠의 신비를 탐구하기 위해 이곳 라이타니엔에 오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랜들

하지만 가끔은 독물학을 사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특수한 잉크 한 방울만 살짝 사용하면, 달콤한 글자조차도 치명적인 부호로 변하게 할 수 있거든.

랜들

단지, 연구소를 떠난 후에도 학자의 탈을 쓰고 있는 정치인들이, 이렇게나 조잡하게 모방하진 않을 거란 걸 눈치챘어야 했는데.

랜들

후우, 난 이 편지도 '그런 문제'일 줄 알았거든.

페인

잠깐, 그 말은… 아니야!

랜들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이에 조그마한 오해가 생긴 것 같네.

랜들

하지만 먼저 찾아온 건 너희들이니까, 내가 사과하진 않겠어.

페인

하……하하……내가 그 사람들의 공범이 되려 했을 때부터 보복당할 각오는 되어있었거든. 그거야말로 꼭두각시의 쓰임새일 테니까 말이야.

페인

다만 이번 대가는……

랜들

받아들이기 좀 힘들겠지. 기숙사로 돌아가서 천천히 이 비보를 곱씹어 보도록 해.

랜들

아니면 내게 복수하고 싶어? 상관없어. 다만 그땐 좀 더 똑똑하게 해야 할 거야.

페인

내게 시간이 얼마나 남은 거지……

랜들

경험상 짧으면 3일, 길어도 일주일은 넘지 않을걸.

페인

빅터 일행은 네가 약속 장소로 가려는 걸 알고 있어.

랜들

나도 알아, 그건 내가 던진 미끼니까, 그런 짓궂은 장난은 쉽게 끝나선 안 되지.

랜들

네가 문을 두드리기 전에, 이미 녀석들에게 보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거든. 겸사겸사 내가 새로 개발한 시약도 시험해 볼 수 있겠네, 기말고사 복습까지 되고 말이야.

페인

나도 끼워줘.

랜들

흠? 네가 투항했다고 해서 신뢰 같은 게 생긴 건 아니야.

페인

내가 이 학교를 선택해서 타지에 공부하러 온 이유는, 물론 가족을 피하려 온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지식을 탐구하기 위해서였어. 귀족의 하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페인

내 적은 처음부터 오직 녀석들뿐이었지.


빅터

배신자!

랜들

얘는 이 말밖에 할 줄 몰라? 대체 이렇게 시시한 사람한테 어떻게 네가 3년이나 휘둘렸는지 통 이해가 안 가는데.

랜들

심지어 갑질이나 일삼는 양아치 녀석이 한 장난 아니랄까 봐, 수준이 너무 형편없잖아…… 고리타분하고 비효율적인 데다가 참신함도 없고 말이야.

페인

나도 이해가 안 가, 처음엔 그저 무탈하게 학교생활을 하기 위해서였는데, 순순히 따랐던 게 나를 더 큰 위험을 빠뜨릴 줄이야. 전혀 예상 못 했어.

페인

쟤네 봐봐, 지금 일어서지도 못하잖아.

빅터

빨리…… 빨리 네 아츠를 멈추고 의무실 선생님을 불러와! 안 그러면 너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전액 장학금은 필요 없어진 거냐, 페인?

빅터

그리고 너, 랜들. 학교에서는 공격성을 띠는 아츠의 사적인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고! 퇴학 처분이나 기다려라! 라이타니엔은 널 받아주지 않을 거고, 라테라노에도 돌아갈 수 없을 테니까!

랜들

너희는 아직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닫지 못했구나. 당연히 내 오리지늄 아츠의 본질도 이해하지 못했고. 이건 공격 아츠가 아니라, 내가 직접 조합한 시약이 일으킨 환각일 뿐이야.

빅터

……환각이라고? 말도 안 돼! 내가 느낀 고통은 확실히 진짜였다고! 벌써 내 허리까지 차 올라왔단 말이야…… 빨리 멈춰! 우리를 속일 생각하지 말고!

랜들

짓궂은 장난의 원리를 설명해 주기는 싫은데, 스스로 깨달을 만큼 좀 똑똑해질 수는 없겠어?

랜들

옆에 있는 사람이 보기엔 너희는 그냥 넘어지고 나서, 머리카락과 종아리를 잡아당기며 꽥꽥 비명을 지르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을걸. 난 너희에게 실질적인 피해를 주지도 않았다고.

랜들

그리고 팔다리가 녹아내리는 장면은 그저 내 소소한 개인적 취향이야. 학교 규정이 너무 보수적이라, 이 작은 꿈을 환각 속에나마 담을 수밖에 없었거든.

빅터

괴물……

랜들

칭찬 고마워.

페인

빅터, 브리트니, 오늘 밤 일은 다른 사람에게 떠벌릴 수 없을 거야. 랜들이 설계한 '짓궂은 장난'은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을 테니까.

페인

만약 네 친하다는 숙부에게 이 얘기를 흘리려거든, 그전에 언제든 죽음의 환각에 빠질 준비부터 해야 할 거야. 랜들이 시약 조제법을 나한테도 아낌없이 알려줬거든.

브리트니

빅터, 빨리 대답하라고! 이제 난 더 이상 다리에 감각이 없어…… 빨리!

빅터

알았어!

빅터

페인, 오늘 밤 일어난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 제발, 제발 너희 모두 우릴 좀 놔줘!

페인

앞으로 또 '새 친구'를 찾을 거야?

빅터

절대 찾지 않을게! 맹세해, 네가 마지막이야! 아니, 넌 이미 '친구'가 아니야, 다시는 널 귀찮게 하지 않을게!

페인

랜들.

랜들

실험은 꽤나 성공적이었어. 너희 비명 소리도 합격이고. 너희들은 제법 훌륭한 시험 대상이었어, 이만 가보도록 해.

페인

겨우 이 정도로 해결되다니…… 3년 동안 지워낼 수 없었던 먹구름이, 그냥 이렇게 걷혀 버린다고?

랜들

애초에 그리 복잡한 일도 아니었거든.

페인

무고한 학생이 괴롭힘을 당하는 일도, 계획 실패 후 구타당하는 일도 없고, 내 장학금까지도 무사한 건가?

페인

반항이란 게 상상하는 것만큼 그렇게 어렵진 않다는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난……

랜들

난 여전히 사과하지 않을 거야.

페인

하아…… 넌 전혀 그럴 필요 없지. 나쁜 일을 했으면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 다 자업자득이잖아.

페인

랜들, 부탁인데 편지 한 통만 좀 부쳐줄 수 있을까?

랜들

혹시 네 부모님께 보낼 편지야?

페인

부모님께선 내가 라이타니엔에 유학 오는 걸 지지해 주지 않으셨어. 두 분은 상인으로서 대대로 이어진 가업을 운영해 오셨거든. 외아들인 나는 당연히 그 후계자가 되어야 했으니까.

페인

난 아츠 서적과 함께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어, 부모님은 오리지늄 아츠를 사용할 줄도 모르셨고, 관심도 없으셨어. 단지 내가 좋아하는 걸 아셔서 맞춰주신 것뿐이었지.

페인

난 부모님에게 고개를 숙이기도 싫고, 도움을 청하기도 싫었어. 설령 내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해도 말이야.

페인

하지만 그럼에도 난 매일 우체국에 가서 우편을 확인했어. 혹시라도 부모님께서 내게 먼저 관심을 보여주면, 나도 주저하지 않고 미리 다 작성한 편지를 보내는 걸 종종 생각해 왔거든.

페인

이제 버티는 거나 맞서는 것 모두 의미가 없어졌네. 실은 어머니가 만든 잼 파이가 조금 그리워. 물론 그게 상점에서 파는 밀키트라는 건 알고 있지만, 어머니는 거기에 본인만의 향신료 레시피를 추가하셨거든.

랜들

난 단 거 별로인데.

랜들

근데 그게 먹고 싶으면, 그냥 집에 찾아가면 되는 거 아니야?

페인

하하…… 농담하고는. 그래서 난 이제 얼마나 남은 거야, 2일? 5일?

랜들

별일 없으면 수십 년은 더 남았겠지.

페인

……농담하는 거지?

랜들

안타깝지만, 농담이 아니야. 답장에 쓰는 잉크는 전혀 치명적인 독이 아니었거든. 내겐 그다지 맛있을 것처럼 들리진 않았지만, 여전히 네겐 그 파이를 먹을 기회가 있다고.

랜들

처음엔 그냥 널 겁줘서 달아나게 하려고만 했거든. 네가 화들짝 놀라는 책벌레가 아닐 줄은 미처 몰랐지만…… 실망이라도 한 거야?

페인

아니……흐윽…… 이렇게나 기뻤던 적이 없던 것 같아.

랜들

이건 내가 기대한 반응이 아닌데. 자, 눈물이나 좀 닦아.

페인

고마워, 랜들. 이거 봐봐, 하하…… 너무 울어서 손이 말을 안 듣잖아……

페인

응? 내…… 손이?

랜들

난 잉크가 치명적이진 않다고만 했지, 독이 전혀 없다고는 안 했다?

랜들

걱정 마, 그냥 일반적인 부종이고, 단지 손가락을 잠시 동안만 못 움직이게 할 뿐이니까. 대략 72시간 후면 정상으로 돌아올 거야. 그래도 이 처벌이 독으로 죽는 것보단 훨씬 낫지? 아닌가, 시간을 계산해 보면……

랜들

오! 너 이거 때문에 기말 첫 시험을 딱 놓치겠네. 그럼 장학금도 물 건너가겠는데.

페인

하…… 진작에 깨달았어야 했는데, 이게 바로 너라는 걸 말이야.

랜들

너도 엄연히 '도전장'을 쓴 사람이니, 내 '보답' 목록에 들어가는 게 당연하잖아. 게다가 넌 그 두 사람 앞에선 너무 벌벌 떨고 순종적이어서…… 정말 보기 불편했다고.

페인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야.

페인

휴…… 랜들, 넌 내 문제 하나를 해결해 줬지만, 동시에 또 다른 문제를 안겨줬다고.

페인

내년 내 학비는 이제 어떡하지?

랜들

부모님과 이야기해 봐.

랜들

편지야 이미 다 써놨었으니까, 몇 글자만 고치면 바로 보낼 수 있을 테고.

페인

……

랜들

내가 네 음모를 어떻게 간파했는지 알아?

페인

편지가 너무 조잡하다고 했었잖아.

랜들

내 부모님은 내게 편지 같은 건 쓰지 않아.

페인

뭐라고?

랜들

편지지나 말투, 냄새 모두 탐정 소설에서 자주 실마리로 쓰이는 단골손님이지만, 그게 내가 짓궂은 장난을 간파할 만큼 믿을만한 증거는 아니야. 그 편지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랜들

내 부모님은 앞에선 나한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도 못하셨거든. 그런 오그라드는 편지는 더더욱 쓸 리 없지…… 애초에 난 별 기대도 하지 않았어.

랜들

오히려 그 가짜 편지는 네가 받고 싶어 했던 거였겠지.

랜들

네 부모님은 한때 네게 엄청 관심을 가졌으니까, 넌 부모님에게 여전히 중요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던 거지. 미리 답장까지 준비해 둘 정도로 말이야.

페인

난 참 바보 같네.

랜들

그래.

랜들

하지만 그건 네가 편지를 썼기 때문이 아니라, 네가 편지를 써놓고도 보내지 못했기 때문인 거지.

랜들

너한테 부모님에게 고개를 숙이라고 설득하진 않을 거야. 넌 옳은 결정을 했고, 네 부모님은 많은 잘못을 했으니까.

랜들

만약 네 부모님이 이 편지를 보고도 널 나약하게 여긴다면, 실망하고, 화내고, 편지를 찢어 버린 다음, 그게 아니라고 다시 말하도록 해.

랜들

스스로 하고 싶은 걸 하는 거야.

페인

랜들, 넌 대체 어떻게 모든 결정을 그렇게 자신 있게 내릴 수 있는 거야?

랜들

아무도 내게 내가 잘못했다고 말해 주지 않거든.

페인

하하…… 나도 한번 잘 생각해 볼게.

페인

아니, 손이 원래대로 회복되면 바로 편지를 보내겠어!

페인

고마워, 랜들.

랜들

내가 원한 반응은 이게 아니래도 그러네.

랜들

자, 내 답장도 이미 없애버렸으니, 짓궂은 장난은 이제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네. 그나저나 페인이 쓴 이 가짜 편지는……

랜들

흠, 아무리 봐도 그 두 사람 말투는 아니라니까.

랜들

그래도 뭐, 기념으로 남겨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