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산 밖
카란 성녀가 각 세력과 교류한 것은, 잠깐이라도 성녀의 책임을 내려놓고 프라마닉스의 신분으로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다.
등장 오퍼레이터: 프라마닉스
쉐라간드 신이시여
쉐라간드 신이시여
경전 연구 이외의 일로 장로님들을 대전으로 모셔 정말 죄송합니다.
이번 카시미어 상단의 대표가 카란 성녀와의 만남을 요청했는데, 장로님들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어처구니 없는 소리군요. 외부인이 어찌 성녀님을 마음대로 만날 수 있단 말입니까?
또한, 성산 역시 외부인을 들일 수 없습니다.
확실히, 이런 세속적인 일을 전부 만주원으로 들인다면, 여러분의 평화도 깨질 거고요.
하지만 쉐라그의 관리자인 제가 상대의 초대를 거절하면 외교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어요.
외부인과 비즈니스를 하는 건 예전부터 엔시오데스의 일이었습니다. 카시미어에서 온 것은 일개 상인에 불과한데, 성녀님과의 대화를 요청한다는 자체가 분에 넘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꼭 그렇다고만 보긴 힘들죠. 카시미어에서 상업연합회의 권세는 얕잡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게다가 카시미어는 발달한 상업과 막대한 자금을 가지고 있기에 오히려 저는 상대가 쉐라그에 압력을 가하여 불리한 계약을 맺으려 하지 않을지 걱정이 됩니다.
상업연합회가 쉐라그에 대표를 파견했다는 것은, 여러 방면에서 협력할 의향이 있다는 것이겠지요.
더 중요한 것은 성녀와 직접 대면을 요청했다는 겁니다. 이는 이미 비즈니스상의 범위를 초과했다고 봐야겠죠.
카란 무역과의 협력은 시작에 불과해요.
그리고 엔시오데스는 단지 실버애쉬 가문의 리더일 뿐이에요. 그가 할 수 있는 약속과 담보의 무게는 제게 못 미치죠.
성녀님이 외지인을 직접 만난다는 것……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가집니다.
제 생각도 그래요.
그럼 성녀님은 만주원에 외부인을 들이실 생각인 겁니까?
아니요. 성산은 성산입니다. 만주원 또한 쉐라그의 성지이긴 매한가지구요. 저는 쉐라간드 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산을 내려가서 카시미어의 대표를 만날 겁니다.
그건……
고작 외부인 한 명의 무례한 요청 때문에 산을 내려가는 건, 체통을 잃는 행위입니다.
매일 경건히 기도를 올리는 쉐라그의 백성들도 성녀님을 뵙기란 하늘의 별 따기인데, 외부인이 어찌 이렇게 함부로 성녀님을 만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네. 저도 이 만남이 매우 드문 기회라는 걸 상대가 알아주길 바랍니다. 그래서 그쪽에도 신도들이 쉐라간드 님을 참배할 때 행하는 일련의 의례를 거행하도록 요청할 생각입니다.
쉐라그의 백성들은…… 아직은 제 행동의 의미를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이게 될 거예요.
쉐라그가 외부와 긴밀한 관계를 구축해 나갈수록, 더 많은 정계 인사들이 면회를 위해 쉐라그를 찾아올 거예요. 그에 따른 책임은 응당 제가 져야 하고요.
여러 장로님들도 잘 생각하셔야 해요. 엔시오데스가 카시미어의 사업을 묵인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분명 잘 알고 계시겠죠.
카란 무역회사는 산업 기술을 대가로, 저희에게 절대 유리하지 않은 계약을 수없이 체결하고 있는 실정이에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테니 엔시오데스를 추궁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저는 형세가 쉐라그에 유리한 쪽으로 바뀌길 바라고 있어요.
쉐라그를 수호하는 쉐라간드 님도 분명 변화를 바라고 계실 거예요.
……엔시오데스, 엔시오데스. 그가 없었다면 쉐라그도 지금 여기까지…… 하아.
글쎄, 어차피 대부분의 사람은 설산을 바라보며 평생을 살진 않지.
우린 이미 늙었어. 젊은이들이 보다 나은 삶을 살게 하는 게, 나쁠 건 없잖나?
하지만 성녀님, 이번에 가시는 길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괜찮아요. 시녀가 돌봐줄 거고, 실버애쉬 가문의 전사들이 지켜줄 테니 아무 걱정 없어요.
협상도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쉐라간드 님이 보살펴주실 테니까요.
후…… 여기 진짜 춥네.
하얀 입김이 나오는 곳은 정말 오랜만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겨우 눈을 한 번 보겠다고 쉐라그로 외근 신청하지 않았을 텐데.
하아, 다행스러운 건 그저 사람을 데리러 갈 뿐이라는 거야. 거기다 인사 오퍼레이터가 4시까지 기다려도 안 오면 기다릴 필요 없다고 했잖아.
입사 지원하는 사람이 시간을 어길지도 모른다니, 대체 어떤 녀석이야?
파일을 좀 볼까…… '프라마닉스', 이름은 엄청 차가운 느낌이지만, 옷은 엄청 따뜻해 보이네.
으으, 안 되겠어. 일단 어디 가게라도 들어가서 핫팩이 있는지 물어봐야지.
사장님, 혹시 여기 핫팩 있어?
네네, 지금 갑니다~ 근데 핫팩이 뭐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
외지에서 온 관광객인가 봐. 따뜻한 차라도 한잔 줄까?
여기 꽤 춥지? 추워 죽겠다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별 거 아니라는 사람도 있지만 말이야.
차 따라올 테니까 편히 둘러보고 있어.
아, 그래……
휴, 여긴 없는 게 없네. 게다가 거의 다 처음 보는 것들이야.
자, 우선 차부터 마셔. 우리는 여기 설원을 넘을 때 다들 이걸 마셔.
아, 그렇군. 고마워.
어디서 오는 길이야?
음, 로도스 아일랜드……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여긴 관광객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라 자세한 것까지는 잘 기억 못해.
(이 초상화 속 사람, 낯이 익는데……)
쉐라그 밖에도 많은 곳이 있을테니, 언젠가 돈이 모이면 여행을 다녀보고 싶어.
(사진을 꺼내 봐야겠어.)
쉐라그에는 지금 막 도착한 거야, 아니면 이미 관광을 마친 거야? 우리 가게에도 기념품이 있는데……
미안한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혹시 쉐라그에는 여기 걸려 있는 초상화 속 인물처럼 생긴 사람이 많아?
에이, 그게 무슨 말이야? 이분은 우리 성녀님이야. 성녀님과 닮은 사람이 있을 리가 있겠어?
콜록, 콜록콜록……
예전엔 성녀님의 초상화가 많지 않았어. 그래서 영지 사람들은 각 가문의 저택 앞에 걸린 초상화에 기도하러 갈 수밖에 없었지.
사실 그 시절에는 다들 초상화가 성녀님이 맞는지도 몰랐어. 우리 같은 일반인은 대전이 있을 때만 성녀님을 볼 수 있었으니까.
그것도 광장에서 엄청 많은 사람들 사이에 끼인 채로, 멀리서 슬쩍 바라보는 정도로 말이야.
그래도 성녀님의 방울 소리를 듣고, 쉐라간드 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했어.
근데 요즘은 달라졌어. 엔시오데스 님이 쉐라그에 온 관광객들이 성녀님의 모습을 궁금해한다는 것을 아시고는, 초상화랑 자수, 조각상을 만들게 하셨거든.
초상화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리라고 하셨지. 엔시오데스 님은 성녀님을 자주 뵙는 분이니까.
게다가 지금의 성녀님은 그분의 여동생이셔. 그러니 잘 모를 리가 없잖아?
하, 그런 거였구나……
그럼 만약 성녀님이 쉐라그를 떠나면 어떻게 되는 거야?
뭐? 그럴 리가 있겠어? 성녀님은 평소에 성산을 내려오지 않으시거든.
하지만 혹시라도 성산을 내려오신다면 그야말로 큰 사건이겠지.
참, 쉐라그는 쉐라간드 님이 지켜주신 다는 거, 너도 안 믿는 거지? 외지에서 온 관광객은 다들 안 믿더라고.
음, 아예 안 믿는 건 아니고……
내가 여기서 이렇게 장사를 할 수 있는 것도, 다 성녀님이 쉐라간드 님의 기적을 가져다 주셨기 때문이야.
내가 작년에 이 가게를 열자마자, 그 사람들은 싸우기 시작했지.
그 사람들?
아,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는 3대 가문을 말하는 거야.
자기들끼리 싸웠을 뿐만 아니라, 철도를 폭파해서 관광객과 화물 모두 못 들어오고 있어.
진짜 피땀 흘려 모은 자본금으로 시작한 사업인데 쫄딱 망하게 생겼으니, 내 심정이 어땠겠어.
그땐 쉐라간드 님께 제발 살길을 알려 달라고 매일 기도했지.
그리고 기도한 것이 드디어 이뤄졌어. 성녀님이 산에서 내려오셨고 쉐라간드 님의 기적이 나타나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경솔한 짓을 할 수 없게 되었지.
아, 쉐라간드시여……
그럼, 하나만 더 물어볼게. 성녀님은 대체 어떤 분이셔? 그분은, 음, 쉽게 어울릴 수 있는 분이신가?
하하, 그게 대체 무슨 질문이야.
성녀님은 쉐라간드 님을 받드는 분이니, 틀림없이 너그러운 분이실 거야.
쉐라간드 님이 너그러운 신이 아니셨다면, 나도 그런 무례한 질문에 답하지 않았을 거야.
하하, 확실히 실례였네……
고마워, 사장님. 나 망토 하나 살게.
……성녀님의 자수가 있는 건 말고 평범한 무늬가 있는 거로 줘, 평범한 거.
이렇게 즐거운 회담 중에, 흥을 깨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정말 미안해요.
곧 성녀의 일일 명상 시간인데, 이 일은 미룰 수 없어서요.
아닙니다. 저희가 방해를 한 것이니 성녀님은 일정대로 진행하십시오.
솔직히 이번 쉐라그 방문에서 확실히 카란 성녀님을 뵐 준비를 제대로 못했던 것 같네요……
카시미어가 쉐라그와 상호 이해를 깊게 할 의향을 보이니, 제가 나서는 건 당연한 거죠.
저는 카시미어 상업연합회에 있어, 쉐라그의 카란 성녀와 소통하려는 것 자체가 일종의 도발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가까운 시일 내에 감정회에서도 쉐라그와의 접촉을 시도할 거예요.
……많은 걸 알고 계시군요.
그리고 이런 식의 전개는 성녀님의 뜻과도 맞아 보이네요.
이는 쉐라그가 대외적인 교류를 하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한 걸음일 뿐이에요. 굳이 말하자면, 저는 감정회의 대표도 당신처럼 우호적인 성의를 가지고 쌍방의 이익을 위해 함께 노력하려는 사람이었으면 합니다.
과찬이십니다, 성녀님.
앞으로도 상업연합회와 쉐라그의 교류는 성녀님의 지지만 있다면, 틀립없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입니다.
당신에게 쉐라간드 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아, 벌써 오후 4시가 되었네요……
성녀님, 이번 여정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외지인이 주제넘게 성녀님과의 만남을 청했는데, 이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이례적으로 산까지 내려오시다니, 정말 너그러우시군요.
저희 카란 무역회사가 협상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성녀님께 직접 왕림을 하시게 하다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앞으로는 쉐라간드 님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성녀는 쉐라간드 님이 선택하신 사자이니 이런 외교 자리에 나가는 것도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쉐라간드 님은 자애로운 분이세요. 저도 그분의 뜻을 따라 산을 내려온 거예요.
……알겠습니다. 쉐라간드 님의 자애에 감사드립니다.
바깥에 버든비스트 부대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실버애쉬 가문의 전사들이 성녀님을 만주원까지 안전히 모실 겁니다……
아니요. 저는 남은 일정이 있으니, 실버애쉬 가문의 전사들을 눈 속에 대기시킬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그럼 엔시오데스 님이 저희에게 성녀님을 제대로 모시지 않은 죄를 물으실 겁니다.
엔시오데스…… 쉐라간드 님은 죄를 묻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그분의 백성도 죄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곧 명상 시간이네요. 이만 돌아가 보세요.
네, 실례가 많았습니다.
당신에게 쉐라간드 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후…… 드디어 끝났네. 얼른 약속 장소로 가야지……
엔시오데스는 정말 성가시네. 아직도 내 계획을 방해하려 하다니.
흥, 또 내 앞을 막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꽁꽁 얼려버려야지, 핑곗거리도 찾지 않을 거야.
뭐, 아무리 엔시오데스도 그냥 날 다시 만주원에 돌려보내려 할 뿐, 지금 내가 어디로 향하는지는 모를 거야.
확실히 지금은 성녀의 수업 시간이야.
하지만 지금의 난 엔야니까.
아니, 나는 프라마닉스야.
“……이번에 하산하면 카시미어 대표를 만나는 일 외에 꼭 해야 할 다른 일이 있습니다.”
“앞으로 보름 동안 만주원의 일들은 장로님들께서 살펴봐 주시기 바랍니다.”
이거, 진짜로 성녀님이 남기신 편지인가?
성녀님이 경문에 다신 주석을 수년간이나 봐왔는데, 그분의 필체를 못 알아볼 리는 없잖나.
아무래도 오래전부터 계획하신 일인 것 같군.
이 무슨,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사태인가……!
성녀님이 산을 내려가 보름 동안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만주원과 성녀님의 위엄이 어찌 되겠나?
쉐라간드 님의 진노가 우리에게 떨어질지도 모를걸세.
하아, 성녀님이야말로 쉐라간드 님의 뜻을 받드는 분이지. 그런 성녀님이 세라간드 님의 허락을 받으셨다고 하시니, 우리는 믿고 기다릴 수밖에 없네.
이 보름 동안은 어쩔 수 없이 대외적으로 성녀님이 칩거 수련 중이라 당분간은 면회할 수 없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군.
엔야는 자신의 생각이 확고한 아이야. 산을 내려간 데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쭉 돌이켜보게. 우리가 그녀의 말에 탄복하지 못한 적이 있었나?
……
하아, 어쩔 수 없군. 방문자들을 어떻게 해야할지 나도 대충 생각은 해두었네.
스튜 맛집에서 안쪽으로 가 두 번째 골목, 여기구나……
5분 뒤면 4신데 왜 아직도 안 오는걸까.
사진이나 다시 한번 확인해 둬야겠다…… 아니, 카란 성녀인데 못 알아볼 리가 없잖아.
음, 이런 인적이 뜸한 골목이라, 설마 누군가에 의해 끌려 들어갔다가, 살해당해 실려나가는 꼴이 되는 건 아니겠지……
뒤돌아보지 마세요.
앗, 항복할게. 난 그냥 평범한 관광객이야. 돈도 없고 가족이랑 연락 끊은 지도 오래라 죽여도 좋을 것 하나 없어……
쉿. 조용히 하세요. 당신은 누구죠?
방금 관광객이라고 말했잖아……
회사는?
로도스 아일랜드, 제약회사야. 주로 광석병 치료약을 개발하는데, 아직 여기까진 시장 진출이 안 됐어……
검은 안 뽑는 게 좋을 거예요.
성녀를 살해한다면, 그 죄과는 감당할 수 없을 텐데요.
쿨럭쿨럭…… 죄송합니다, 카란 성녀님! 쉐라간드 신이시여, 제발 나한테 진노하지 마시길!
괜찮습니다. 저는 협약에 따라 로도스 아일랜드를 도우러 온 거예요.
그나저나 당신은 쉐라그 사람들이 입에 달고 사는 기도문을 알고 계시네요?
후. 당신한테 위협받았더니, 기억해둔 기도문 중 하나가 마침 생각났어.
……1초만 늦었어도 손이 나갔을 뻔했어. 그럼 더 큰일이 났겠지.
하아, 당신도 제가 성녀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정도인데, 쉐라그 사람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죠?
만약 검은 옷으로 온몸을 꽁꽁 싸맨 사람이 로도스 아일랜드 사람이 아니라 어떤 수상한 자이고, 그 자한테 제 정체를 들켰다고 생각해 보세요.
성녀가 혼자 돌아다닌다는 사실이 동네방네 다 퍼졌겠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등 뒤로 접근해 당신의 신분부터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내가 마을에서 들은 성녀님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래요? 하지만 저는 성녀가 아니라 프라마닉스이니 다른 게 정상 아닐까요?
로도스 아일랜드에서도 저를 성녀라고 부르면 당신의 입을 얼려버릴 거예요.
하하, 알았다고……
딱 4시 정각이네. 조금만 더 늦었으면 그냥 가려고 했는데.
음, 많은 사람들이 저를 막아서잖아요. 그래서 저도 제가 로도스 아일랜드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어요.
그러고 보니 성녀는 마음대로 산을 내려올 수 없다던데.
맞아요. 하지만 외교 상대가 청하는 만남을 무시할 순 없잖아요?
그래서 키야르가 로도스 아일랜드에 갈 때, 먼저 쉐라그를 방문한 카시미어 상단의 대표를 찾아가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리고 키야르를 통해 제 생각을 전했고요.
그리고 며칠 후, 상대 쪽에서 성녀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소식이 만주원에 전해졌어요.
산에서 내려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한 건가?
산을 내려와 놀기 위해서만은 아니에요.
이런 계기가 아니었다면 외부인은 쉐라그에 카란 무역회사 외에도 카란 성녀가 있다는 것도, 더욱이 그 성녀가 흔쾌히 면회에 임하리라는 것도 알 수 없었겠죠.
훗, 만약 모든 게 엔시오데스를 중심으로 돌아가면, 쉐라그는……
내가 알기로 엔시오데스는 당신의……
……그러고 보니 저는 쉐라그를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음,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한 것 같네)
나도 로도스 아일랜드에 가기 전까지는 빅토리아를 떠나본 적이 없었어.
다행히 로도스 아일랜드엔 테라 각지에서 온 셰프들이 있어서 굶진 않겠지.
그래도 고향에서 먹던 음식이랑은 다르니까, 향수병은 각오해야 하겠지만.
그럼, 당신은 고향에 돌아가 본 적 있나요?
왜 그런 질문을……
나는 감염자야. 고향에서 환영하지 않으니 가고 싶어도 못 가.
아, 미안.
그냥 궁금했어요. 전 지금까지 타지에서 살다 돌아온 사람들만 봤거든요.
쉐라그를 떠나 타지에서 몇 년 살다가 돌아온 이들의 얼굴을 봤는데, 처음엔 누군지 아예 못 알아봤어요.
분명 젊은이라서, 순식간에 성장해버린 거 아닐까?
그렇죠. 하지만 키도 크고 어깨도 넓어진 데다…… 사고방식이 확 바뀌었더라고요.
예전에는 쉐라그를 떠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항상 이런 생각을 했어요. 쉐라그 바깥은 대체 어떤 곳일까, 그 사람은 거기서 뭘 봤던 걸까?
누구든 나가기만 하면 바뀌는 걸까, 뭐 그런 거요.
가요. 얼른 로도스 아일랜드에 가서 키야르를 보고 싶어요.
그래, 알았어.
아, 그리고 당신이 성녀라는 얘기를 듣고 망토를 하나 샀어.
후드를 써서 얼굴을 가리면, 사람들이 못 알아보겠지.
오, 정말 주도면밀하네요.
망토 쓰게 책 좀 들어줄래요?
그래, 《사황 전쟁 약사》?
아, 박사님이 빌려주신 책이에요.
제 방에 박사님이 빌려주신 심심풀이 책이 아직도 많거든요. 이건 가는 길에 읽고 반납할 거예요. 나머지는 다음에 얘기하죠.
사실 박사란 분을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저에게 일을 하라고 재촉하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로도스 아일랜드에 휴가를 보내러 가는 거니까요.
로도스 아일랜드는 오퍼레이터들이 일을 하는 곳이 아닌가……
흠, 그래도 즐거운 휴가 보내길 바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