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댄서
자신의 과거를 아는 사람과 만난 아르모니. 첩보원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상대의 제안을 거절한다.
등장 오퍼레이터: 아르모니
오랜만이야, 로잘리.
……
로잘리!
……아, 친애하는 리타.
이렇게 얘기하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네. 전처럼 같은 숙소에 배정받지 못해서 정말 아쉬워.
가드 스쿨의 군사 훈련 말이야,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힘들지 않아?
……로잘리, 그날 입학시험에 늦지 않았어?
크흠…… 갑자기 그건 왜? 당연히 안 늦었지. 늦었다면 어떻게 지금 여기 있겠어?
……아무것도 아니야. 받아, 네 《군사과학개론》이야. 필기랑 메모가 도움이 됐어. 고마워.
시험 날 아침에 돌려주려고 했는데 기다려도 안 보이길래…… 계속 마음에 걸렸거든.
같이 저녁이나 먹을래? 겸사겸사 수다도 떨고, 휴일에 입을 치마도 같이 골라줘.
미안, 이제 스테파니가 준비한 무도회에 가야 해서.
그 라이타니엔 백작의 딸 말이야?
상인이 연줄을 찾고, 음악가나 극작가가 추천인을 찾는 것처럼 발이 넓은 스테파니와 인맥을 쌓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지난번에 만났을 땐 군단 참모의 외손녀가 준비한 연회에 간다고 했잖아. 그런 군사 가문은 언제나 심복을 필요로 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런 건 네 뜻에 어울리지 않아. 예전엔 너도 그런 떠들썩한 사교 활동을 싫어했잖아.
그렇게 얘기하지 마, 리타. 난 그냥 춤추는 게 좋을 뿐인걸?
……그래.
그럼 다음에 한가할 때 또 얘기하자.
표정 좀 풀어.
환경이 바뀌었으니 우리에게도 각자 리듬을 찾을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야.
(흥얼거리며) ……뭐랄까, 스텝을 밟는 것처럼 말이야. 아쉽다, 너랑 같이 가고 싶었는데.
……로잘리, 우리가 왜 로열 가드 스쿨에 입학하려고 했는지 기억나?
당연하지. 뛰어난 군인이 되기 위해서잖아.
응. 장교도 군사 귀족도 아닌 군인이 되기 위해서였어. 난 아버지처럼 몸을 사리기만 하는 스카만드로스가 되고 싶지 않았고……
넌 우리 선생님처럼 질서를 지키는 군인이 되고 싶어 했지.
그러니까 내 말은…… 고민이 있으면 언제든 털어놓으라는 거야.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로 한 번도 뵈러 가지 못했잖아.
……아, 이제 정말 가봐야겠다. 미안해, 리타.
신문에 '런디니움 및 카즈델 경제문화교류협회'라고 적혀 있군.
대체 어떤 공작이기에 저 많은 살카즈 용병을 런디니움으로 데려와 부릴 수 있는 건지.
내 생각은 달라.
아휴, 이제 됐어. 내막을 알고 있다 해도 나한테는 얘기하지 말라고.
어머, 어느 공작이 빅토리아를 장악하게 될지, 사자왕 후손의 향후 행방에 대해 귀족들 사이에 어떤 소문이 떠도는지, 어떤 도시에 폭동이 일어날지…… 정말 궁금하지 않아?
그걸 알아봤자 나한테 뭐 좋을 게 있겠어? 당신이 어느 시의원의 가정교사인지조차 알고 싶지 않다고.
뭐, 그 가정교사라는 신분도 이제는 과거형이겠지만.
맞아, 어제가 마지막 수업이었어.
꼬마 도련님이 어느 정도 지식을 쌓았으니, 나도 쓸모가 없어진 거겠지.
하하…… 넌 이미 충분히 정보를 알아낸 거 아닌가?
내 상사의 벽에 훈장 몇 개 더 달아주려고, 직접 이 주변의 일을 담당할 정도로 충분하다는 거야?
크, 크흠! 남의 일에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누가 공을 채가지 않도록 손을 써두는 게 좋잖아.
늘 있는 일인데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됐고, 패션 잡지나 하나 줘.
알겠어.
앞으로 누구든 당신과 똑같은 특제 주화를 들고 오면 이 잡지를 팔아도 된다는 거지?
걱정 마. 잘 알선해 두었으니까, 별문제는 없을 거야.
그리고 누군가에게 발각되더라도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문제없겠지.
당신은 그저 약속한 보수만 받는 거야. 평화로운 삶이 깨질 일은 없어.
하핫, 역시 날 잘 알고 있군.
덕분에 우리 애들을 더 좋은 학교에 보낼 수 있게 됐어. 머지않아 진정한 신사가 되겠지.
그런데 그 군인 정신을 지우는 데 얼마나 걸렸지? 내가 아는 장교들은 제복을 입고 있지 않아도 장교인 게 티가 나던데, 당신은 전혀 그렇지 않아.
군인?
……내가 군 소속인 건 맞지만 군인이었다곤 얘기한 적은 없는데.
그럼, 난 이만 연회에 가봐야 해서.
먼 훗날 인근 도시가 멸망하거나 성왕궁 서쪽 회당에 유혈 사태가 벌어진다고 할지라도, 난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삶을 유지할 수 있겠지……
똑똑한 척 체면치레하는 사람들은 이제 질렸어.
그럼…… 우리 첩보원이 어떤 정보를 가져왔는지 확인해 볼까?
이 편지는……
……누가 바꿔치기한 건가? 봉투 안에 쪽지가 들어 있잖아.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빅토리아의 적이 아닙니다.'
흐음, 이걸로는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르겠는데.
너도나도 '빅토리아를 위해서'라고 주장하니, 원.
사자왕을 매단 사람이든, 끝까지 왕실을 수호한 사람이든 하나같이 자신이 빅토리아를 지켰다고 생각하잖아.
만약 다들 같은 방향으로 노력했다면, 나 같이 염탐질하는 사람도 필요 없을 텐데.
이 정체불명의 인물이 무슨 꿍꿍이인지 파악하려면 오늘 밤 연회에서 정보를 하나 흘려야겠어.
그 얘기 들었어요? 시의회의 고집불통 노인네 중 두 명이 증기 전차를 다시 만들 생각이 있다면서 공장주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는 법령을 공포했답니다.
하하, 적어도 우리가 쓴 돈이 헛되진 않았나 보군요.
나이가 많을수록 의사 표현을 잘 안 하는 법이지요. 군대가 무기를 구입하는 것은 일상이지만, 놈들은 누구의 군대인가, 누구와 싸우는가와 같은 질문이 두려운 겁니다.
특히 사자왕이 사라진 이후로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가 더 어려워졌지요.
그러니까요. 지난달에 병사한 그 늙은 의원 기억나세요?
이웃의 말로는 그날 밤 다들 어렴풋한 비명 소리를 들었다네요. 그렇다고 해서 누가 병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노인네들이 손에 쥔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겠지요.
연회장으로 들어가시죠. 제가 술 한잔 대접하겠습니다.
음모, 뇌물, 암살…… 그다지 특이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저쪽 발코니로 가면 파트너와 접선할 수 있겠지?
안녕하세요, 아르모니 씨.
하아……
지금 시간 괜찮으신가요?
시간 없어. 그나저나 내 오리지늄 아츠의 물줄기에 숨이 막혀 죽고 싶지 않다면 언행에 주의하는 게 좋을 거야.
반응이 정말 빠르네요.
너도 제법이네? 호흡이 흐트러지지도 않았고.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네요. 아르모니 씨를 협박하기 위해 쪽지를 남긴 건 아니었어요.
그럼 날 찾은 이유가 뭘까?
당신에게 인사를 전하라는 한 후작님의 분부가 있으셨습니다.
……내게 협조할 생각이라면 최소한 그럴듯한 정보부터 꺼내야 하지 않을까?
아니요, 전 그저 새로운 제안을 하려는 것뿐입니다.
당신이 타락한 사자왕의 군대를 위한 첩보원이 되도록 강요받은 걸 알아요. 당신 같은 사람이 이렇게 재능을 썩히는 건 너무 아깝잖아요.
이제 더 이상 몇 년 전 그 사소한 일로 괴로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솔직히 그때 아르모니 씨는 아무것도 몰랐으니 실수라고 할 수도 없겠지만.
……하지만 그 일을 덮기 위해 난 많은 혜택을 받았지.
그나저나 당신, 아는 게 너무 많은 것 같은데?
선생님, 저 왔어요. 편지도 잘 받았습니다.
내일이 입학시험이라 몇 가지 여쭤보고 싶어서요. 특히 이 오리지늄 아츠 부분에 대해……
……안 계시나?
선생님? 괜찮으세요?
이 부딪히는 소리…… 선생님의 사브르 소리인데…… 설마 강도가 들었나?
선생님 같은 베테랑 군인에게 강도 몇 명은 아무것도 아닐 테지만…… 내 실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지도 몰라.
……밀수단을 모두 처치했다! 창고를 수색해라!
선생님…… 홀리 씨?
여기 잔당이 남아 있다!
무기를 내려놔! 손 들어!
……당신들은, 누구시죠?
확실하게 물어봤나?
네. 홀리의 학생인데 아직 어려서 밀수단이 물자를 되판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던 것 같습니다.
홀리를 도와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한 건 맞지만 자신이 무슨 편지를 전달했는지도 모르고, 선생을 의심한 적도 없었다고 합니다.
홀리는 전역 후 귀족 사립 고등학교에서 교사 일을 했으며, 5년 동안 학생들에게 꽤 존경받던 모양입니다.
그 학생의 말에 따르면 홀리는 밀수단에 학생을 끌어들일 조짐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다른 학생들까지 조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미 이틀을 구속했고, 압력을 가하지 않은 일반적인 질문만 하긴 했지만, 지켜본 결과 거짓말은 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더군요.
그럼 들어오라고 해. 윗선에서 시킨 일은 해야 하니까.
그래,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했다고?
선생님께서 무거운 죄를 저지르셨고, 제가 모르는 사이에 그 일에 일조했다는 정도는……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되시는 건가요……?
협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군부와 난투를 벌였으니 죽게 되겠지.
우리는 1년 넘게 군부의 물자 밀수 사건을 조사해 왔다. 과거 군대에서의 인맥을 이용한 홀리가 밀수단의 핵심 인물이란 건 확실하지.
그러니 너무 동정하지는 말도록.
……네.
……홀리는 좋은 선생이었나?
선생님께서는……
강인한 전사셨어요. 전 선생님의 힘을 늘 동경해 왔고요.
예절 수업이나 사교 수업보다 선생님께 배운 게 훨씬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짓을 하고, 이런 식으로 실패하고 무너지다니……
……조금 의외예요. 그뿐이에요.
제가 존경한 분이 고작 이 정도였다니……
이 사건으로 당신이 받은 충격이 얼마나 클지는 이해가 갑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죠. 더는 당신을 추궁하지도, 홀리와 공범으로 간주하지 않을 테니.
다만 우리가 바라는 건, 이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시민인 당신이 이 사건의 진상을 발설하지 않는 것입니다.
머지않아 홀리와 두 밀수단 단원은 군부의 본 작전 협조자로 기록될 거예요.
세 사람이 '교전 중 용감하게 희생'했다는 걸 명심하세요. 홀리의 부고가 학교에 퍼지면 누구한테나 이렇게 얘기해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이들에겐 훈장도 수여될 겁니다. 당신이 존경하는 사람의 마지막 명예를 지키고자 하는 우리의 의도도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
……
네,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어요.
뜻이 맞아서 기쁘네요. 당신에게도 혜택을 드려야겠죠.
혜택이요?
가드 스쿨 입학시험 때문에 홀리를 찾아왔다고 들었습니다만.
로열 가드 스쿨에 입학하고 싶은 건가요?
저는……
내게 아직도 그런 게 중요한가?
전 단지 우연히 당시 군에서 있었던 일의 진상을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일 뿐입니다.
옛날이야기나 하겠다고 쪽지까지 보낸 거야? 대단한 성의인걸.
이미 몇 년이나 지난 일이라, 난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몇 년간 참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전도유망한 젊은이가 자신에게 걸맞은 명예를 누리지 못하는 모습을 더는 지켜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 당신의 인생은 이미 본인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을 텐데요.
가드 스쿨에는 입학했지만 졸업 전에 이름과 신분을 바꿔야 했으며, 첩보 업무 중에도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쌓을 수 없었죠.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일까요, 후작님께서는 아르모니 씨의 능력을 좋게 보시는 것 같더군요. 제 추천만 있다면 직접 후작님을 뵙고, 후작님의 측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첩보원 신분에서 벗어나 더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을 거예요.
이걸로 제가 당신의 믿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하긴, 어차피 그런 것들뿐이지.
그게 무슨……?
신경 쓰지 마. 혼잣말이었어.
내 생각엔 이렇게 계속 얘기해봤자 내 아츠 유닛만 네 목에 더 가까워질 뿐일 것 같은데.
말과는 달리 아르모니는 아츠 유닛을 거뒀다.
……이만 가 봐.
아르모니 씨, 만약 첩보원 신분에서 벗어나는 게 어려워서 그러는 거라면, 이쪽도 얼마든지 당신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넌 내가 내 인생과 운명을 원망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본데……
넌 인생이 계략으로 가득 차 있고, 언뜻 보기에 사소한 사건이라도 그 이면에는 당신 같은 거물의 계획이 있다고 생각하지?
아르모니 씨도 첩보원으로서 이런 상황을 많이 봤을 텐데요?
그래, 질리도록 봤지. 이젠 지긋지긋할 정도고.
근데 솔직히 말하면 말이야, 그 누구도 내게 첩보원 일을 강요하지 않았어. 몇몇 선생님께서 날 선택했고, 난 동의했을 뿐.
그거 알아? 내 인생이 내 뜻대로 흘러간 적이 없었던 거라면 난 지금 널 여기서 죽여야 해. 언젠간 방해가 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난 네가 마음에 들어.
……
가자, 우리 둘 다 이 연회를 즐기러 온 거잖아. 안 그래?
아르모니가 가볍게 돌아섰다.
연회장 안, 악단이 공연 시작을 알리는 인사를 올렸고, 통창 너머로 새어 나오는 밝은 불빛이 아르모니의 얼굴을 비췄다.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아르모니가 손을 치켜들더니, 유려하게 한 바퀴 턴을 돌았다.
정원 안에서 아르모니는 그저 혼자서 경쾌한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당신은…… 누구와 함께 춤을 출 건가요?
아르모니라는 '이름'의 필라인은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