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점
어린 노시스는 자신만의 생각을 품고 있지만, 미숙함 탓에 악당들에게 이용당해 엔시오데스를 위험에 빠뜨린다. 하지만 그 사건을 계기로 두 사람은 친구가 된다.
등장 오퍼레이터: 노시스
저 파울비스트는 창밖으로 세 차례나 지나갔다. 노시스는 그 사실을 깨닫기 전, 파울비스트가 몇 차례나 더 지나쳤으리라 생각했다.
쉐라그의 파울비스트는 주로 산 정상에 둥지를 텄다. 매일 아침 해가 뜨면, 성년이 된 파울비스트는 둥지를 떠나 인간의 땅에 와서 먹이를 구했다.
한기는 그들이 추위를 견디는 능력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체격도 건장하게 만들었다.
누군가 파울비스트의 하루를 추적한다면, 그들이 하루 안에 쉐라그 절반을 돌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적어도 그의 집에 있는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럼 어제 배운 내용에 이어 진도를 나가도록 합시다.
쉐라그의 체제는 빅토리아와 유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삼대 가문은 빅토리아의 대공작에 비유할 수 있고, 만주원은 어떤 의미로 국왕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요.
빅토리아의 체제를 이해하게 되면 그 유사성이 뭔지 깨닫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차이점을 더 확연하게 느끼게 되겠죠.
어떻습니까, 엔시오데스 도련님?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선생님.
쉐라그의 체제는 쉐라간드 님을 향한 믿음 위에 세워졌어요. 그렇기에 저희의 체제는 빅토리아와 비슷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다르죠.
《쉐라간드》 기록에 따르면 저희 삼대 가문은 쉐라간드 님에게 백성을 이끌겠다고 약속했어요. 통치권은 그에 대한 아주 사소한 보답일 뿐이죠.
그런 점에서 삼대 가문과 만주원의 관계는 빅토리아 대공작과 국왕의 관계와 결정적인 차이가 있어요.
훌륭합니다, 엔시오데스 도련님……
노시스는 한쪽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창밖으로 날고 있는 파울비스트의 모습을 상상했다.
파울비스트들은 아주 똑똑했다. 그들은 곧 주방에서 처리될 점심의 잔반을 기다리기 위해 이곳에 몰려든 것이었다. 어쨌든 실버애쉬 가문의 음식은 쉐라그 내에서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배를 채우고 나면 그들은 은심호로 가서 주변의 풀밭을 거닐거나 햇볕을 쬐는 버든비스트들과 교류했다.
운이 좋으면 근처에서 얼음 구멍 낚시를 하는 쉐라그인이 건져 올린 불운한 린수를 나눠줄 수도 있었다.
해가 지면 그들도 고된 하루를 보낸 사람처럼 날개를 퍼덕이며 따뜻한 둥지로 돌아가 알찬 하루를 마무리할 것이다.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평소처럼 간단한 시험을 치르도록 하지요.
노시스는 눈앞의 시험지를 보면서 문제를 푸는 게 파울비스트가 먹이를 찾는 일보다 더 쉽다고 생각했다.
그는 파울비스트들이 죽을 때까지 이렇게 먹이를 찾고, 잠을 자고, 이따금 동족과 영역 싸움을 벌이는 일을 매일, 매년 반복한다고 생각했다.
그 반복에는 일종의 규칙이 있는 듯했다. 쉐라그의 파울비스트들은 평생 산들 밖으로 날아갈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다 됐습니다.
아쉽게도 두 문제는 잘 모르겠네. 노시스, 넌?
난……
이럴 줄 알았어. 다 풀었구나.
어? 나랑 답이 다른 문제도 몇 개 있잖아……
엔시오데스 도련님, 노시스 도련님은 어릴 적부터 에델바이스 가문의 서류더미에 파묻혀 계셨잖습니까.
도련님의 장점은 다른 데 있습니다. 그렇죠?
절 위로하시는 건가요?
한발 양보해서, 노시스 도련님의 학업 성적이 높아질수록 실버애쉬 가문의 차기 가주인 도련님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네요.
아, 이런. 마터호른과 약속 시간이 다 되었네요. 먼저 가볼게요.
그러시지요.
참, 노시스……
노시스 도련님은 잠깐 남으십시오.
……엔시오데스, 무슨 일 있어?
음, 딱히 특별한 건 없어.
이게 도련님의 지난 시험 성적입니다.
역시나 만점이었죠.
정말 완벽한 성적이에요. 지금까지 노시스 도련님처럼 똑똑한 아이는 한 번도 못 봤답니다.
감사해요.
빅토리아에 가면 틀림없이 더 넓은 무대를 누빌 수 있을 겁니다.
올라퍼 씨가 추진하는 유학 정책은 도련님 같은 아이에게 딱 맞는 정책이나 마찬가지죠.
하지만 이 아버님 서명은 가짜지요?
……?!
도련님도 끝까지 속일 생각은 없으신 것 같군요. 어쨌든 가족들도 언젠간 알게 될 테죠.
하지만 가족이 늦게 알게 될수록 도련님이 이 일을 기정사실화할 가능성도 높아질 겁니다.
……
이게 도련님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이었겠죠.
하지만 그 노력이 완벽하진 못했군요.
전……
얘기해 보시죠, 노시스 도련님. 빅토리아 체제를 공부하고 나니 쉐라그가 어떻게 보이던가요?
……
걱정 마세요, 이건 저희 둘만의 사적인 대화니까요. 전 비밀을 지키는 데 일가견이 있으니 믿어도 됩니다.
……낙후되고 비효율적인 곳 같아요.
그럼 엔시오데스 도련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존경할 만한 지도자가 될 거예요.
하지만 이해하진 못하겠어요.
어떤 점을 말입니까?
자신이 쉐라그를 이끌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생각하는 점이요.
아, 생각했던 것보다 급진적인 사상이군요. 좋습니다.
아무래도 지식으로 인한 혼란스러움이 만족감보다 더 큰 모양이군요.
역시 쉐라그는 노시스 도련님을 수용할 수 있는 무대가 아닙니다.
전 잘 모르겠어요.
자신을 속이지 마세요. 도련님은 아버지의 서명을 위조해 유학까지 신청하려 했잖습니까.
진작부터 이곳을 떠나고 싶었던 것이지요?
……아버지가 동의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런 잔꾀는 통하지 않겠지만 제가 도련님을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이 일을 모르는 척하거나 도련님의 아버지를 뵙고 유학에 대한 허락을 받아낸 척할 수도 있죠.
……어째서죠?
도련님은 저랑 닮았으니까요.
……
전 당신의 친구입니다, 노시스 도련님.
친구는 서로 돕고 지내야 하는 법이잖습니까? 제가 도와드릴 테니 도련님도 절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
야.
음?
노시스, 노시스!
엔시오데스? 왜 다시 왔어?
후, 널 초대하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너더러 남으라고 하는 바람에.
초대?
그래, 아버지가 빅토리아에서 구매한 첫 열차가 오늘 시범 운행을 한대. 같이 보러 안 갈래?
왜 하필 난데?
음…… 그야 같이 공부하는 사이니까?
게다가…… 궁금하지 않아? 열차라고! 무려 쉐라그의 첫 열차야!
난……
“난 관심 없어. 집에나 갈래.”
이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내뱉을 수 없었다.
그는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상상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저녁 식사를 차리며 자신의 아들이 공부에 관한 좋은 소식을 들고 오길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서류 더미에 파묻혀 연구하고 있을 것이다. 그의 눈앞에는 쉐라그 수천수백 년의 역사만 존재할 뿐이었다.
지금이 몇 시인지, 자신의 아들이 뭘 하는지도 잊어버렸을 것이다.
감명받은 부분이 있으면 아버지는 큰 목소리로 아들을 부를 테고, 그의 아내는 아들이 올라퍼 씨의 자제와 수업을 받고 있다고 전할 것이다.
그러면 그는 웅얼거리며 대답하곤 다시 연구에 몰두할 것이며, 아들이 돌아왔을 땐 이미 자신이 하려고 했던 말을 잊은 후일 것이다.
그는 식탁에서만 오늘 자신이 뭘 발견했고, 내일은 뭘 발견할 것인지 이야기했다.
노시스에게 아버지는 곧 익사할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 호수에 무한한 비밀이 담겨 있다며 되레 그에게 손을 뻗었다.
만약 그렇다면……
야, 왜 멍때리고 있는 거야? 갈 거야, 말 거야?
……갈게.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
쉿……
좋아, 아무도 없는 것 같아.
실버애쉬 가문의 도련님이면서 왜 도둑처럼 그러는 거야……
그야 아버지가 타지 말라고 했으니까.
왜?
막 구매한 열차의 시범 운행이라 사고가 날 수도 있으니 위험하다나 뭐라나.
그런데도 넌……
너무 궁금해서 그래.
매일 공업, 이과, 문학을 공부하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단 말이야.
하지만 안 배울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그러니 적어도 그걸 배워서 뭘 얻을 수 있는지 확인해 봐야지.
……
너도 그런 걸 싫어해?
응…… 처음엔 별로 안 좋아하긴 했지.
하지만 나중에 방법을 찾았어.
방법?
응, 그 지식이 뭐가 될지 생각해 보는 거야.
예를 들어 우리가 공업 지식을 잔뜩 쌓으면 결국 열차를 얻게 되는 것처럼 말이야.
난 책에 있는 내용이 실제로 눈앞에 나타났을 때 동기 부여가 되더라고.
진짜 이상한 녀석이라니까.
그런가?
이 열차가 진짜 운행되는 모습을 상상해 봐. 그럼 하루 만에 쉐라그 곳곳을 누빌 수 있을 거야.
그런 걸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든다면 재밌지 않겠어?
너 진짜……
왜 그래?
생각보다 훨씬 더 유치하구나.
난 지금의 아버지처럼 매일 외국에서 온 상인이나 귀족을 상대하느라 지쳐서 가족과 있을 때도 웃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예전에는 그런 분이 아니셨는데.
넌 지도자가 되어야 할 사람이니 익숙해져야 해.
그래야겠지. 정말 그래야 한다면 그전까지라도 실컷 웃고 싶어.
솔직히 처음엔 네가 쉐라그 역사밖에 모르는 녀석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네가 수업 중에 창밖의 파울비스트를 관찰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선, 내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
난……
그것들을 관찰하는 걸 좋아하지?
그게 아니라……
아, 열차가 멈추려나 봐.
어서 내려가자. 들키면 혼날 거야.
……
엔시오데스.
응?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줄래?
그래.
여긴 왜 데려온 거야?
……
친구는 서로 돕고 지내야 하는 법이잖습니까? 제가 도와드릴 테니 도련님도 절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엔시오데스 도련님과 단둘이 할 얘기가 있으니 이곳으로 데려와 주십시오.
모르겠어. 근데 선생님이 널 여기서 만나고 싶다고 했어.
선생님?
누구냐?!
긴장하지 마세요. 엔시오데스 도련님은 잠시 잠든 것뿐이니까요.
선생님?!
데려가십시오.
알겠어.
너무 거칠게 굴지 말고 도련님을 잘 챙겨주세요.
걱정 마. 우리 돈줄이니 당연히 조심해야지.
너, 대체 정체가 뭐야?!
실버애쉬 가문과 에델바이스 가문의 도련님을 가르치기 위해 쉐라그로 온 가정교사입니다.
다만 가정교사 보수가 부족해서 귀족 어르신들을 위한 부업을 하고 있지요.
……
뭘 원하는 거지?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지 마시죠. 친구를 여기까지 데려온 건 다름 아닌 당신이잖습니까?
너……!
노시스 도련님, 정말 제가 당신 아버지와 논의해 보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이 생각한 대로 당신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유학에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은 기정사실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당신이 아무리 멀리 도망친다 해도, 양친은 당신을 다시 데려올 수 있을 겁니다.
……
전 당신을 돕고 있는 겁니다, 노시스 도련님.
쉐라그에서 벗어나고, 이 무미건조하고 끝이 보이는 삶에서 도망치고 싶다면……
가서 부모님과 올라퍼 씨에게 말씀드리세요.
한동안 엔시오데스 도련님과 놀고 있을 테니 방해하지 말라고 말이죠.
……
올라퍼 씨. 저예요, 노시스.
네, 지금 엔시오데스 도련님과 같이 있어요.
네, 몰래 열차에 타서 죄송해요. 그래서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아뇨, 도련님이 신세를 진 게 아니라 오히려 제가……
아, 언제쯤 돌아올…… 생각이냐고요?
노시스가 고개를 들자 하늘을 지나가는 파울비스트 무리가 보였다.
어린 파울비스트가 무리에서 벗어나 홀로 설산 바깥쪽으로 향했다.
북풍은 어린 짐승에게 불변의 법칙을 쉽게 깨뜨릴 수 있다는 무모한 용기를 심어주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을 기다리는 건 가혹한 현실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줄곧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줄곧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설산 바깥으로 날아가겠지만, 적어도 이런 방식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
곧 돌아갈 테니 걱정 마세요.
뭔가 기척은 있던가요?
없어.
좋군요.
좋은 소식을 가져온 거라면 좋겠습니다만.
어른들한테 얘기했으니 한동안은 의심받지 않을 거야.
우리와의 약속을 지킨 모양이군요.
이 사람들은 어떻게……
굳이 대답하자면, 보란 듯이 당당하게 들어왔습니다.
쉐라그는 너무 원시적인 곳이라 다른 그 어떤 곳보다도 쉽게 뚫을 수 있었죠.
……
엔시오데스를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음…… 아주 간단하죠. 올라퍼 씨에게 자신이 방심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할 겁니다.
그러고 나서 우린 빅토리아로 가면 됩니다.
우리라고?
그렇습니다, 우리.
제가 약속을 어길 거라고 생각했나요?
약속을 어기는 게 강도들의 주특기인 줄 알았는데.
꽤나 비꼬는군요, 도련님.
저를 원망해도 상관없습니다.
학교도 다니고, 원하는 것도 전부 배우게 해주겠습니다. 가끔 저를 도와주기만 한다면 말이죠.
나름 괜찮은 거래 아닌가요?
……
엔시오데스가 배고파할 거야. 식사를 가져다줄게.
……그래요,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오, 다른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올 줄이야.
……
네가 이 일에 가담했다는 걸 이렇게 보여줘도 돼? 내가 탈출에 성공하면 무사하지 못할 텐데.
자신만만하네.
농담이야.
내 가족들은……
아직 모르셔.
음, 네가 미리 손을 써뒀다면 내가 납치된 사실은 늦게 알려지겠지.
쳇, 정말 주도면밀한 선생이라니까.
밥이나 먹어.
손이 묶여 있는데 어떻게 먹으라고?
……
네가 먹여줘.
……
음, 고마워. 그래도 맛은 있네.
무섭지 않아?
무서워. 근데 어쩔 수 없잖아. 좀 전에 생각해 봤는데, 어쩌면 이런 일에 익숙해져야 할지도 몰라.
무슨 소리야?
지금의 쉐라그는 너무 약해. 이런 일이 또 일어날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
그래서, 그 녀석과 함께 쉐라그를 떠날 셈이야?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내 목숨과 맞바꾼 길이니 그 정도는 알려줄 수 있잖아?
……응.
왜? 쉐라그가 싫어?
싫진 않아. 다만…… 우리 아버지처럼 역사나 이미 벌어진 일들을 연구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어.
반드시 아버지 같은 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만 하면 도망치고 싶어져.
아, 너희 아버지? 몇 번 뵈긴 했는데 확실히 다가가기 어렵긴 하더라.
진작 알았다면 우리 집에 자주 초대할 걸 그랬네.
네가 내 두 여동생과 친해졌다면, 나도 하루 종일 저 녀석들이랑 붙어 있지 않아도 됐을 텐데.
……저 녀석들이랑은 나도 아마 잘 지내지 못했을 거야.
떠난 뒤에 하고 싶은 일이 있어?
……아직 모르겠어.
그러면 안 되지. 근데 아버지도 처음엔 아무런 목표가 없었는데, 공부하다 보니 명확한 목표가 생겼다고 하셨어.
너 진짜……
난 신경 쓰지 마. 지금 위험한 쪽은 너라고.
휴, 노시스. 솔직히 얘기해 봐.
뭘?
쉐라그를 떠나고 싶은 이유가 이곳이 시시해서야? 그렇게 이해하면 돼?
……꼭 그런 건 아니야.
넌 이해 못 해.
솔직히 이해가 안 되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내가 쉐라그를 시시하지 않은 곳으로 만든다면?
뭐?
다른 사람한텐 처음 말하는 거니까 어디 가서 얘기하면 안 된다?
비록 지금의 쉐라그는 너무 약해서, 많은 부분을 타협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은 이해해.
하지만 더는 아버지가 굽실거리는 모습을 볼 수가 없어. 네 말대로 너무 시시하단 말이야.
우리는 그 외국인들에게 쉐라그인이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더 강하고 두려운 존재가 되어야 해!
……
쉿……
꼬마야, 면회 시간은 끝났다.
……
형님께서 기다리고 있으니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가 봐. 이 녀석은 내가 감시할 테니.
쳇.
노시스, 평소에도 아츠 유닛을 가지고 다니는 거야?
……꽤 멀리 돌아왔네.
가만히 있어. 풀어줄 테니까.
솔직히 조금 전에 묶여 있을 때가 더 안전했던 것 같아.
……놈들은 쉐라그를 평등한 거래 관계로 여기지 않아. 우리를 더욱 몰아세울 뿐이겠지.
음, 맞는 말이야.
……
미안해. 그 녀석이…… 이런 짓을 할 줄은 몰랐어.
하하, 노시스. 왠지 네가 좀 마음에 드는 것 같아.
뭐?
내가 널 용서했단 건, 아까 대화로 충분히 전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내가 널 납치당하게 만든 것과, 지금 후회하며 널 구하려는 건 별개의 일이야.
그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
……
그래서, 도망칠 방법은 있고?
생각해 봤는데 없는 건 아니야.
결국 처음부터 날 구하러 온 거였네?
……그렇게 말한 적 없거든.
잡았다!
흥.
이 자식, 가렵지도 않다고!
순순히 항복해. 그럼 형님이 용서해 주실지도 모르니까.
꿈 깨시지.
크윽……
이 자식들…… 도망 못 간다……
휴, 아찔했어.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노시스?
뭔데?
싸울 때 아츠까지 사용한 건 일부러 소란을 피우기 위해 그런 거지?
그래, 그 이유는……
저기 오네.
이건 현명한 선택이 아닙니다, 노시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유가 뭐죠?
……지금 이런 삶이 마음에 안 드는 건 사실이야.
내가 어떤 삶을 바라는 건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그게 너와 함께 가고 싶다는 뜻은 아니야.
……안타깝군요, 노시스.
당신은 자유로워질 기회를 놓치고 말았어요.
이곳에 있는 한 바깥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영원히 깨닫지 못하겠죠.
꼭 그렇진 않아.
나중에 쉐라그가 그 넓은 세상이 될지도 모르잖아?
엔시오데스 도련님, 빅토리아가 당신들의 발전을 진심으로 허락할 것 같습니까?
빅토리아는 쉐라그가 너무 약하기 때문에 동정심에 뭔가를 베푸는 것뿐입니다.
때가 되면 그들은 자신 몫의 열매를 따러 올 테죠.
당신들이 말하는 발전은 그저 남 좋은 일일 뿐입니다.
지금껏 비슷한 말을 수없이 들었지만, 내 대답은 아버지와 똑같아.
한번 두고 보자고.
……훗, 아직도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여긴 도시와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당신 아버지가 소식을 듣는다 해도, 당신들을 찾기까진 시간이 걸리겠죠.
구하러 올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니.
너희들 같은 외국인은 쉐라그를 몰라도 너무 몰라.
이 일대는 나무가 빽빽해서 야생 버든비스트가 많이 살고 있지.
쉐라그가 버든비스트를 양식하기 전만 해도, 쉐라그인은 주로 이곳에서 버든비스트를 길들였어. 너희들이 숨어 있던 곳은, 바로 선조들이 남겨둔 유적이지.
버든비스트? 그런 온순한 동물이 우릴 어쩔 수 있다는 겁니까?
흔히 있는 오해지. 버든비스트는 온순하지 않아. 너희들이 보는 온순한 버든비스트는 쉐라그인이 긴 세월에 걸쳐 길들인 결과야.
진짜 버든비스트는……
뭐지?!
저쪽을 봐! 버든비스트들이 몰려오고 있다고!
휴식을 방해받은 야생 버든비스트는 까다로운 상대지……
쳇, 저 녀석들을 잡아!
엔시오데스, 버든비스트를 탈 줄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하, 날 뭐로 보고!
(흥분한 울음소리)
워, 워, 착하지. 착해.
(안정된 울음소리)
휴식을 방해해서 정말 미안해.
이만 가 봐.
(낮은 울음소리)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안전하겠지?
응, 도시 쪽도 소란을 눈치챘을 테니 사람들이 올 때까지 잘 숨어만 있으면 안전할 거야.
그리고……
하…… 올라퍼 씨의 분노가 우리 가족한테까지 퍼지지 않아야 할 텐데.
무슨 소리야, 노시스.
넌 날 구한 은인이야.
농담하지 마. 아무리 변명해 봤자 난……
뭐 어때. 서로 감싸주는 게 친구잖아?
친구?
그래, 친구.
마터호른은 어릴 때부터 날 따랐고, 바이스의 경우도 좀 특별해. 그 둘 말고는 다른 친구를 사귀어본 적이 없어.
네가 처음이라고 할 수 있지.
……
노시스, 정식으로 약속 하나만 하자.
뭔데?
네가 마음껏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쉐라그를 거대한 무대로 만들어줄게.
그러니까 넌 여기에 남아.
……무슨 약속이 그래?
안 돼?
기왕 만들 거면 우리가 마음껏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쉐라그를 거대한 무대로 함께 만들어야지.
너도 그러고 싶어?
아까 마터호른과 바이스를 빼면 내가 첫 친구라며?
응.
너도 내 첫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