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죄업

죄업

오퍼레이터 레코드브릿지

복수의 여정을 시작한 마운틴. 하지만 마음은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등장 오퍼레이터: 비헌터, 사일런스, 마운틴


뚝, 뚝.

비가 오는 건가?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니 내리치는 번개만 보일 뿐, 유리창엔 비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다.

뚝, 뚝.

시계 소리구나. 그는 그렇게 추측했다.

하지만 고개를 들고 올려다본 벽걸이 시계는 이미 멈춰 있었고, 부서진 목각인형만이 그 아래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축축한 손바닥이 느껴졌다. 움켜쥔 주먹 사이로 무언가 한 방울씩 떨어지더니, 이내 발밑이 끈적이는 액체로 흥건해졌다.

주먹을 펴자 피로 물든 손바닥이 보였다.

???

죄인.

앤소니

누구냐?!

???

크큭, 앤소니. 절대 풀 수 없는 족쇄를 차버리고 말았군.

또다시 번개가 내리치면서 어두운 방 곳곳을 환하게 비췄다. 피 웅덩이에 널브러진 창백한 얼굴 하나가 입을 열었다. 잘린 목에서 피가 왈칵거리며 쏟아지고 있었다.

그건, 누구보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앤소니

발 하이드…… 네 형제는 어디 있지?

떨어진 머리

어디 있냐고? 앤소니, 네 발밑에 있잖아.

고개를 숙이자 그를 등지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체가 보였다. 하지만 시체의 머리는 기괴하게 꺾인 채 그를 향해 있었다. 찢어진 피부 사이로 뒤틀린 목뼈가 여과 없이 드러났다.

뒤틀린 시체

왜 떨고 있는 거야, 앤소니? 지금은 희열을 느껴야 하는 상황 아닌가?

뒤틀린 시체

넌 오랫동안 이날만을 기다려왔잖아. 원수를 베고 이곳을 피바다로 만드는 날을 말이야.

앤소니

이, 이게 전부…… 내가 한 거라고……?

뒤틀린 시체

그래. 그러니까 좀 웃어 봐. 정말이지 아름다운 날이잖아, 앤소니.

떨어진 머리

복수해놓고 왜 그런 슬픈 표정을 하고 앉았어? 크크큭.

앤소니

아니…… 모든 게 너무 늦어 버렸어.

떨어진 머리

오, 내 아들아, 너무 늦었단다. 흐흐흑, 나와 네 엄마는 네가 출소하는 날까지 못 버틸 것 같구나.

뒤틀린 시체

엄마의 사랑하는 아들, 앤소니. 이미 모두 늦어버렸단다. 흐흐흑……

앤소니

닥쳐! 닥치란 말이야!

앤소니

이 살인자들. 하다 하다 내 부모님 흉내까지 내?

뒤틀린 시체

살인자들이라니, 우리 말이야?

떨어진 머리

그러게. 형, 아무래도 우리 얘기 같은데.

뒤틀린 시체

하지만 앤소니, 두 눈 크게 뜨고 똑똑히 봐. 이 방에 살인자는 단 한 명뿐이야. 한 놈만 손에 피를 잔뜩 묻히고 있잖아.

떨어진 머리

그건 바로 너다. 너야말로 살인자란 소리지.

앤소니

하지만 네놈들은 죽어야 돼, 내 손에 죽어도 싸.

뒤틀린 시체

단호한 말투에 정의로운 대사로군. 앤소니, 모든 게 네 뜻대로 되었는데 왜 웃지를 못하는 거냐?

떨어진 머리

입술을 깨무는 게 아니라 우리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호탕하게 웃어야지.

앤소니

그만해, 닥치라고!

떨어진 머리

눈빛 한번 살벌하네. 형, 살기가 가득하다 못해 쏟아져 나올 것 같아.

뒤틀린 시체

저게 바로 살인자의 눈빛이야! 저게 바로 죄인의 눈빛이라고!

앤소니

닥쳐!!!

뒤틀린 시체

하하하하하핫! 앤소니, 널 기다리고 있으마. 결국 우린 불바다 속에서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앤소니

하, 그런가?

앤소니

어차피 난 화형대에 매달린 채 매일같이 복수의 불길에 휩싸인 탓에 예전의 날 잃어버린 지 오래다.

앤소니

너희를 갈기갈기 찢을 수만 있다면 불길에 뒤덮인다 해도 상관없어. 죄악을 저지르는 게 나의 숙명이라면 기꺼이 벌을 받겠다.

앤소니

이미 불타버린 몸인데 그깟 불길 따위 두려워할 것 같나?

떨어진 머리

그럼 우리를 찾아오도록, 앤소니, 하하하핫!

앤소니

그러지. 원하는 대로 그 불바다에 뛰어들어주마.

그의 눈동자 속에서 거센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앤소니

윽……!

앤소니

후……

앤소니

……또 그 꿈인가…… 머리가 깨질 것 같군.

앤소니

(얼굴을 움켜쥐며) 몇 시나 됐지……

통신 단말기

오퍼레이터 마운틴 씨, 안녕하세요. 지금 시각은 오전 4시 20분이며 날씨는 흐림, 실내 기온은 26도입니다.

앤소니

4시가 조금 넘었군…… 고작 세 시간밖에 못 잤나.

앤소니

……잠도 안 오니 그냥 일어나야겠어.

앤소니

침대 시트가…… 축축해질 정도로 땀을 흘렸나.

앤소니

시트와 베개를 바꿔야겠군.

통신 단말기

오퍼레이터 마운틴 씨. 메시지가 도착했으니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앤소니

……

통신 단말기

앤소니, 네가 말했던 그 재산, 아버지가 널 위해 벙커힐 시티에 남겨뒀던 건데 이미 발견했어. 우리가 재기하기에 충분한 액수야.

통신 단말기

하아…… 아직도 부모님 일로 괴로워하는 건 아니지?

통신 단말기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네가 맨스필드에 있을 때, 하이드브로가 킬러를 보내 살해한 거잖아. 우리가 소식을 들었을 땐 이미 모든 게 끝난 후였어.

통신 단말기

하이드브로는 뿌리까지 뽑아버리는 스타일이잖아. 네가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지.

통신 단말기

네 소식을 듣는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 놈들의 눈과 귀가 안 닿는 곳이 없잖아. 제기랄!

통신 단말기

어쨌든 너도 빨리 털고 일어나야 해. 앤소니, 원래 우리 것이었던 모든 걸 되찾아야 하지 않겠어?

앤소니

진정하자…… 폭력에 잠식되어서는 안 돼…… 침착해, 앤소니.

앤소니

(부들부들 떤다)

앤소니

……젠장.

앤소니

젠장……!

옆에 있던 의자를 벽에 내던지자 벽에 걸려 있던 거대한 전신거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깨진 유리 조각이 마루 위로 흩어졌다.

유리 조각에 분노로 흉악하게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그 순간, 조각에 비친 모든 표정이 일제히 풀어졌다.

앤소니

침착하자, 앤소니.

앤소니

슬픔과 분노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어.


훈련실

앤소니

(생각에 잠긴 듯하다)

비헌터

(뭐야, 넋이 나가서는…… 후후.)

비헌터

덩치, 집중 좀 해!

앤소니

예?!

앤소니

(빠르다!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왔어…… 아, 그렇다고 맞부딪치면 상대가 다칠 테니 머리를 막는 게 좋겠군.)

비헌터

덩치, 방심하지 말라고!

앤소니

(갑자기 방향을 틀어 복부를 노리다니!)

비헌터

늦었어. 이미 늦었다고.

앤소니

어……?

이미 모두 늦어버렸단다. 흐흐흑……

앤소니

아니야…… 닥쳐!

비헌터

앗! 아파라!

앤소니

이런…… 죄송합니다. 주먹을 너무 세게 날렸군요. 슈라 씨, 괜찮으십니까?!

비헌터

이제야 알았어. 덩치, 너 지금까지 나랑 훈련할 때 힘을 전혀 안 썼지?

앤소니

저보다 몸집이 작으시니 전력을 다하면 공격을 받아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비헌터

흥, 뭐래. 그렇게 대단한 정도는 아니거든? 이것 봐, 당장이라도 더 싸울 수 있어!

비헌터

아야야…… 아프잖아!

앤소니

제가 의무실에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힘 조절을 못 했군요.

비헌터

……괜찮아, 훈련이잖아. 조금 다칠 수도 있지.

비헌터

처음부터 훈련이 아닌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다는 거 알고 있었어. 왜 그래? 어젯밤에 잠을 설쳤어?

앤소니

슈라 씨,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젯밤에 독서에 푹 빠지는 바람에 흥분해서 잠을 잘 못 잤습니다.

비헌터

크게 걱정할 일도 아니네. 나중에 좋은 술로 두 병 가져다줄게. 한 병만 마시면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잠들게 될걸.

앤소니

슈라 씨, 술 얘기는 의무실에서 확실히 진단받기 전까진 우선 접어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앤소니

돔마 씨, 어떻습니까?

돔마

상처에 약은 발라줬어, 지금은 푹 잠들었고. 우선 의료부에 입원시키고 이틀 정도 지켜보자. 별문제는 없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돔마

그런데 어쩌다 다친 거야?

앤소니

제가 실수로 그랬습니다.

돔마

뭐?

앤소니

그렇게 보지 마십시오, 돔마 씨.

돔마

앤소니, 넌 그렇게 분별없는 사람이 아닌데 어쩌다……

앤소니

……돔마 씨는 감옥에서 제 모습을 보셨을 테니, 의아해하시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만.

돔마

감옥에서 봤기 때문에 네가 그런 모습을 드러내길 꺼린다는 걸 알고 있는 거야.

돔마

그나저나 안색이 많이 안 좋네, 앤소니?

앤소니

요즘 통 잠을 못 자서 그렇습니다. 밤마다 똑같은 악몽이 되풀이되고 있거든요.

앤소니

꿈에서 저는 양손에 피를 묻힌 채 피 웅덩이에 서 있고, 발밑에는 하이드브로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습니다.

돔마

전에는 그런 꿈을 꾸지 않았잖아. 최근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앤소니

벙커힐 시티에서…… 나쁜 소식을 전달받았습니다.

돔마

설마 부모님께서……

앤소니

눈치채셨습니까?

돔마

그래. 지난번에 책을 돌려줄 때, 책상 위에 올려진 편지를 봤어. 책더미에 깔려 있었지만, 그 위에 남은 눈물 자국은 선명하게 볼 수 있었지.

앤소니

이미 인사부에 사직서를 냈으니 아마 며칠 후면 떠날 수 있을 겁니다. 이곳에 너무 오래 머물렀어요. 이제는 돌아가서 모든 걸 직면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돔마

이곳에 처음 온 그날부터 언젠간 네가 떠나리란 걸 알고 있었어.

돔마

하지만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네가 모든 걸 내려놓고 이곳에 남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그런.

앤소니

돔마 씨, 저도 생각해 봤습니다.

앤소니

한땐 바보같이 이런 망상도 했지요. 부모님을 구하게 되면 가족과 함께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 하이드브로에게 복수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앤소니

하지만 지금 제 머릿속엔 온통 놈들의 피로써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뿐입니다.

돔마

하지만 앤소니, 넌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잖아.

앤소니

그러게 말입니다. 사람을 죽인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요? 한 사람의 생명을 끊는다는 게 어떤 기분일지 궁금합니다.

앤소니

돔마 씨,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사형수의 혈관에 약물을 주입하고, 시체를 소각로에 태우는 건 어떤 기분인가요?

돔마

……처음에는 아주 괴로워.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구역질이 나고 불면증에 시달릴 거야. 심하면 환각을 보게 되겠지.

돔마

시간이 점차 흐르면 자연스럽게 합리화하게 될 거야. 벌 받아 마땅한 존재들이니 당연히 그들을 죽여야 한다고 말이야.

돔마

하지만 언젠간 네 손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이 충분히 많아진 후에는 마음이 평온해질 거야. 그렇게 죽음에 익숙해지게 되는 거지.

돔마

그때가 되면 그들이 생전에 저질렀던 범죄의 의미는 퇴색되고, 죽음도 하찮아지게 돼.

앤소니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겁니까?

돔마

응, 아주 괴로울 거야…… 난 아주 오랫동안 이건 업무일 뿐이라며 스스로 되뇌었지. 하지만 너는 어떨까, 앤소니?

돔마

너는 어떻게 이 괴로운 나날을 버텨낼 거야?

앤소니

……

돔마

어떻게 버텨낼지 생각하기도 전에 결심부터 한 모양이네.

돔마

앤소니, 함께 떠나자. 내가 도와줄게.

앤소니

아닙니다. 제 개인적인 일에 돔마 씨를 휘말리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돔마

네가 맨스필드에서 도망칠 수 있게 도운 그 순간부터 난 이미 휘말린 거나 마찬가지야.

앤소니

괜찮습니다, 돔마 씨. 그만하시죠.

돔마

앤소니……

비헌터

애, 앤소니!

돔마&앤소니

……

앤소니

슈라 씨, 깨어났습니까?

비헌터

너…… 최고급 위스키를 가지고 있다며? 헤헤헤, 언제 마실 거야?

비헌터

다음 주 수요일 어때? 너, 너도 임무가 없고, 나, 나도 임무가 없는 날이잖아.

앤소니

예? 하지만 슈라 씨는 다치셨습니다. 이런 경우엔 보통 한동안 술을 마시면 안 되지요.

비헌터

참, 나 다쳤지…… 으으, 술을 못 마시는구나.

비헌터

으으윽,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너무 괴로워.

앤소니

(슈라 씨…… 정말 괜찮은 걸까?)

돔마

(하아, 아마 마취제 때문일 거야.)

앤소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이마를 문지른다)

돔마

앤소니……

앤소니

예?

돔마

어떤 일이 있어도 아무 말 없이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앤소니

……알겠습니다.


인사부 오퍼레이터

앤소니 씨, 퇴사 처리가 완료되었어요. 요즘 바쁘신 것 같아 제가 직접 전달해 드리러 왔답니다.

앤소니

감사합니다. 제가 직접 가지러 갔어야 하는 건데.

인사부 오퍼레이터

별말씀을요. 저도 지나가던 길이었거든요. 앤소니 씨, 그럼 전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앤소니

예, 알겠습니다.

앤소니

퇴사 처리가 생각보다 빠르군.

앤소니

(방을 둘러본다)

앤소니

떠나기 전에 방을 비워야 하는데 물건이 많지 않아서 다행이야. 금방 치울 수 있겠어.

앤소니

이 책들은…… 도서관에 기증하자.

앤소니

이 술들은…… 술 저장고에 두면 될 것 같고.

앤소니

……아, 깜빡할 뻔했군. 로빈 씨가 빌려준 액션영화 모음집은 떠나기 전에 돌려줘야지.

앤소니

이건 카프카가 선물한 나뭇잎 책갈피고, 이 인형은…… 파인콘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지, 아마?

앤소니

서랍에 무슨 잡동사니가 이렇게 많지? 청소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뻔했네. 내일 돔마 씨를 만나러 갈 때 겸사겸사 의료부 꼬마 환자들에게 가져다주면 되겠어.

앤소니

청소는 얼추 다 끝났으니 가방도 미리 싸볼까. 옷은…… 갈아입을 것만 몇 벌 챙기면 될 것 같고.

앤소니

……

그는 넋을 잃고 말았다.

옷장 문을 열자마자 한 가운데 걸려 있던 양복이 눈에 들어왔다. 양복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생생했다. 옷감을 고르고, 치수를 재고, 양복을 건네받던 그 순간까지 전부 다.

행복해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그가 기회만 생기면 어떻게든 양복을 입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몇 번 입지 않았다.

아까웠기 때문이다.

통신 단말기

오퍼레이터 마운틴 님. 메시지가 도착했으니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통신 단말기

앤소니, 네가 출발한다는 소식에 벙커힐 시티로 오는 루트를 급히 마련해뒀어. 마중할 사람은 티카론토에서 널 기다리고 있을 거야.

통신 단말기

앤소니, 빨리 와야 해. 네 부모님, 내 형…… 우린 하이드브로에게 갚아줘야 할 빚이 잔뜩 있잖아.

앤소니

……

손을 들어 옷섶을 매만지다 보니 어느새 손가락이 옷깃에 닿아있었다. 작은 자수의 감촉이 손끝에 느껴졌다.

거기에는 탑 모양의 자수가 놓여 있었다.

한참을 어루만지던 그는 결국 손을 거두었다.

앤소니

멍청한 짓이었어…… 어차피 떠날 걸 알면서 양복은 왜 맞춰서는.

앤소니

내가 미쳤지.


앤소니

사일런스 씨, 혹시 돔마 씨 계십니까?

사일런스

앤소니, 아마 좀 기다려야 할 거야. 오후에 들어온 급한 환자를 치료하고 있거든.

앤소니

괜찮다면 여기서 돔마 씨를 기다려도 되겠습니까?

사일런스

물론이지. 물 좀 줄까?

앤소니

괜찮습니다. 가서 일 보세요.

사일런스

그래, 그럼 회진하고 올게.

앤소니

(시계를 본다)

앤소니

시간이 될지 모르겠네……

노부인

젊은이! 하아, 젊은이!

앤소니

절 부르시는 겁니까?

노부인

그래, 몇 번이나 불렀는데도 못 듣네.

앤소니

죄송합니다. 시간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군요.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노부인

그게 아니라, 옷 뒤쪽에 구멍이 났던데 내가 꿰매줄까 싶어서.

앤소니

감사합니다. 급하게 나오느라 몰랐군요.

앤소니

하지만 괜찮습니다. 곧 떠나야 해서 시간이 별로 없어요.

노부인

앉아보게. 나이는 먹었지만 손놀림 하난 빠르니까. 몇 분밖에 안 걸릴 게야.

앤소니

……예,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부인.

노부인

돔마 선생님 친구인가?

앤소니

예.

노부인

그래, 여기서 돔마 선생님을 찾는 걸 몇 번이나 봤지.

앤소니

부인께선 돔마 씨의 환자십니까?

노부인

맞네, 돔마 선생님은 참 친절해. 다리가 불편한 나를 몇 달 동안이나 세심하게 챙겨줬거든.

앤소니

돔마 씨는 늘 그래왔습니다. 한결같은 사람이지요.

노부인

돔마 선생님 친구니까 알고 있겠지? 곧 여길 떠난다고 하던데. 어제 내 주치의가 사일런스 선생님으로 바뀔 거라고 그러더구먼.

앤소니

……그게 정말입니까? 속상하시겠습니다.

노부인

에휴, 눈치 없는 환자들이 뒤에서 숙덕거린 탓에 상처받은 게 분명해. 내가 보기에 돔마 선생님처럼 진득하고 세심한 참 의사는 정말 드문데 말이지.

앤소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노부인

그렇다 한들 어쩌겠나? 사일런스 선생님도 몇 번이고 만류했지만 떠나겠다는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고 하네.

앤소니

겉보기엔 친절하지만 고집이 세서 한번 결심하면 누구도 말릴 수 없거든요.

노부인

난 병상에 누워 있으니 선생님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네…… 그래서 그동안의 보살핌에 대한 보답으로 선생님 친구의 옷을 수선해주는 것이지.

노부인

자, 다 됐네. 마음에 드나?

앤소니

예, 감사합니다.

노부인

감사는 무슨. 별일도 아닌데.

앤소니

(시계를 본다)

노부인

가려고?

앤소니

예, 지금 안 가면 늦을 겁니다.

사일런스

어, 앤소니. 그냥 가는 거야? 곧 끝날 텐데.

앤소니

예, 그냥 가려고요.

사일런스

으음, 혼자? 돔마는 분명 너랑 같이 간다고……

앤소니

아닙니다. 전 작별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처음부터 떠날 사람은 저뿐이었으니까요.

사일런스

내가 오해했네. 돔마랑 함께 가는 줄 알았는데……

앤소니

아니요, 돔마 씨는 로도스 아일랜드에 남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리고 복수는 저만의 일이니 절대 다른 사람까지 휘말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앤소니

사일런스 씨, 죄송하지만 떠나기 전에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사일런스

그래, 얘기해.

앤소니

이 책을 돔마 씨께 전달해 주시겠습니까?

사일런스

책만 전해주면 돼?

앤소니

아직 다 못 읽은 책이니……

앤소니

잘 보관해 달라는 말도 함께 전해주십시오.

사일런스

언제 가지러 올 건데? 그것도 얘기해둘까?

앤소니

……

사일런스

침묵이 더 잔인한 대답인 건 알지?

앤소니

사일런스 씨…… 이만 가보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사일런스

앤소니!

사일런스

어이! 앤소니……

사일런스

……하아.


아래를 내려다보자 사일런스의 눈에 모퉁이가 접힌 책장이 들어왔다. 책을 펼치자 책장에 그려진 삽화가 보였다.

낮은 감방 안, 한 사내가 빛을 등지고 서 있다. 사내의 얼굴은 철제 창살에 거의 가려져 있었고, 말라빠진 손가락만이 창살 사이로 비죽 삐져나와 그림 밖을 가리키고 있었다.

삽화 아래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 있었다.

나는 살인죄를 지었다. 난 용서도, 사면도, 구원도 바라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건 오직 고통과 끝없는 괴로움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