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돌아갈 곳
한 통의 편지가 윈드차임스를, 자신도 이름만 들어봤을 뿐인 마을 '석교촌'으로 이끌었다.
등장 오퍼레이터: 윈드차임스
윈드차임스, 윈드차임스!
다행이다. 네가 도시를 나가기 전에 따라와서.
아윈? 무슨 일이야? 내가 우체국에 뭘 놓고 왔나?
아니, 방금 관청에서 사람 하나가 와선, 편지 하나를 석교촌으로 보내달라던 거 있지.
우체국에 있는 전달자 중에도 '석교촌'이란 이름은 들어본 사람이 없나 봐. 시간 좀 써서 알아보긴 했는데도 말이야.
누군진 모르겠는데 결국 누가 “윈드차임스도 모르면 딴 사람들도 모르지” 이러더라고.
그런데 넌 이미 떠난 참이었더라고.
알았어. 나한테 줘.
윈드차임스가 배낭을 열자, 배낭에 가득 찬 편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편지는 여기 넣어둬. 석교촌이란 이름, 들어보긴 했거든. 대충 어느 쪽인지는 아는데, 정확한 위치는 나도 알아봐야겠네. 다른 우편 배달하는 길에 물어보지 뭐.
이번에 배달 끝내면 옥문으로 돌아가? 아니면 용문으로 가?
용문으로 가려고. 요즘 산간 지방으로 보내는 우편이 옥문보단 용문에 훨씬 많이 쌓여있거든.
그럼 배달 다 하고 돌아오면 '미세스 페퍼 아이스크림' 한턱 쏠게. 요즘 광고 계속하더라 거기. 노선을 아예 매운맛으로 갈아탔는지, 하나도 안 달아!
아이스크림은 원래 단 거 아냐?
에이, 단 거 먹다 질리면 매운 걸 먹는 게 유행이잖아.
우편배달 때문에 나가는 건가?
네.
가 봐. 가방 검사는 됐어. 저번에도 편지들을 하나하나 꺼내고 또 차곡차곡 다시 집어넣는데, 보는 내가 다 짜증이 나서 말이야.
감사합니다.
그리고, 장 씨가 고맙다 전해달래.
장 씨요?
왜 저번에 자기 고향 시골집에서 이사해 가지고 편지 보냈던 게 계속 반송된다던 그 털보 있잖아.
그쪽이 그 몇십 통이나 되는 걸 한 번에 보내줘서, 그 양반 편지 받고 감동받아선 얼마나 펑펑 울던지.
아, 생각났다…… 그게 뭐 별거라고요.
그래도 고마운가 봐. 그럼 잘 다녀오라고!
이동도시에서 오래 지내다 보면, “바깥”에 대해 쉽게 잊어버리곤 한다.
하지만 “바깥”은 사실 상당히 가까이에 있다. 거리를 따라 몇 리만 걸으면 모래 바람이 코끝에 닿게 될 정도로.
아저씨, 길 고치느라 수고 많으세요!
어 이게 누구야, 뿔 부러진 전달자 아니냐! 어떻게, 편지 배달 온 건가? 나한테 온 거야, 아니면 우리 작업장에 젊은 친구들 거야?
편지가 있긴 한데, 용문에서 날아온 수당이네요.
수당이 나왔다고……
별로 안 기쁘신가 봐요?
그럴 리가 있나. 밖에 나와서 일하는 게 다 몇 푼이라도 더 벌어서 더 잘 살아보자고 하는 건데! 그냥 좀 걱정이 돼서 그래. 저번에 마을에서 편지 온 게 벌써 두 달도 전 일이라.
저번에 아저씨네 마을 들렀다 왔었는데, 다들 잘 계시던데요.
그럼 다행이네 다행이야.
거 잠깐 기다려 봐. 저녁밥 먹고, 자고 가.
이번에 편지가 많아서, 아무래도 이번엔……
뭘 빼고 그래! 편지 없어도 네가 오면 다 좋아하는데, 네가 이동도시에서 생긴 일들 얘기해 주는 게 다들 그렇게 재밌다고 그런다.
오늘 마침 수당도 나왔겠다, 사람들 보고 오늘은 좀 일찍 밥상 차리라 하면 돼. 젊은 애들도 좀 불러서 네 말동무라도 시켜주면 되고.
다음.
도시 밖에 용무가 있나?
네, 일 보러 갑니다.
안전 검사 차 가방 좀 열어보지.
그러고 보니, 물어볼 게 하나 있는데.
뭡니까?
오늘 점심때 뿔이 부러진 포르테 전달자가 밖으로 나가지 않았나? 어디로 갔는지 알고 싶은데.
“안녕하십니까…… 저는 용문에서……”
아방, 글 아는 네가 와서 좀 봐봐라. 이게 다 뭐라 적힌 건지 영……
이게 뭔데, 손전등? 손전등은 집에 있는데 용문에서 이걸 뭐 하러 보냈지?
아줌마 이게 어딜 봐서 손전등이에요, 망원경이지!
그건 뭐야?
카메라예요. 생활하는 모습을 좀 찍어보고 싶어서요.
아 그 텔레비전 녹화되는 그거?
뭐…… 비슷하죠?
그럼 제대로 꾸미고 와야겠네……
사람들은 일을 너무 많이 하면 무감각해진다고, 무슨 일이든 다 그런 법이라고들 한다. 많이 경험하게 되면 다 그게 당연한 것처럼 습관이 된다고.
하지만 내가 산간 지방과 이동도시 사이를 오가며 제일 많이 배달했던 건, 바로 수취인의 가족이 보낸 편지였다.
비가 며칠 더 오든, 밀이 평소보다 얼마만큼 더 수확됐든 상관없이, 수취인의 가족이 보낸 편지엔 늘 별 차이가 없다.
고향집이 있다면, 사람들은 늘 편지를 쓸 것이다.
아 참, 혹시 석교촌에 어떻게 가는지 아시나요?
북쪽으로 가는 건 아는데, 정확한 위치는 잘 몰라서……
석교촌? 못 들어봤는데. 마을 사람들한테 한 번 물어봐 줄까?
부탁드려요.
미안, 우리도 잘 몰라서.
근데 '변제촌'에, 석교촌에서 왔다는 어떤 젊은이가 친척 집에 눌러살고 있다더라고. 그 사람이면 어떻게 알려나 모르겠네.
변제촌이라…… 잘 됐네요. 마침 거기로 보낼 편지가 있었는데.
왜, 더 앉아 있다 가지 않고?
괜찮아요. 가 볼게요!
거기, 잠시만!
어, 무슨 일이야?
잠깐,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구지?
방금 그 전달자가 석교촌에 간다 그러지 않았나?
뭐 그렇긴 한데…… 어라, 벌써 가는 건가?
우리 집이 석교촌 옆에 있어서, 안내해 주려고!
석교촌에서 온…… 아, '아량' 얘기하는 건가?
아량, 이리 와 봐, 누가 길 좀 묻고 싶다 그러네!
북쪽으로 가서, 북분촌에서 십몇 리 정도 가다 보면 몇 사람은 있어야 에워쌀 수 있는 큰 고목나무가 나오는데, 거기서 산길로 들어가.
그렇게 들어가면 그다음은 사람이 드나드는 양 갈래 길이 나오는데, 오른쪽으로 하루 정도 쭉 가면……
네, 기억했어요.
길이 이렇게 복잡한데, 그래도 기억할 수 있다니 다행이네.
사실…… 거기서 왼쪽으로 가면 저희 고향 마을이거든요.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딱 봐도 소박하게 생긴 게 우리 산 출신인 줄 내가 단번에 알아봤잖아.
그래서, 아가씨 고향 쪽은 어떻게, 다들 잘 계시고?
……텅 비었어요. 다들 도시로 일하러 갔거든요.
쯧, 요 몇 년 동안 불경기라 그래. 우리 마을도 거기서 거기지 뭐. 어떻게든 버텨내고 살고 있긴 하다만…… 아무튼 가는 길 조심하고.
거기 두 사람, 방금 전달자 하나가……
그 아가씨는 무슨 일로 찾으신대?
나도 석교촌으로 가려고 하거든. 아까 어떻게 가는지 어렴풋하게 들리긴 했는데, 멀리 있다 보니까 제대로 안 들려서……
북분촌에 도착했네.
북분촌에 보낼 편지는 두 통이니까, 이제…… 석교촌으로 가는 것만 남았네.
왜 사람들이 저렇게 많이 몰려 있지?
다들…… 무슨 공고 같은 걸 읽고 있는 건가?
맞지, 우리 마을도 이제야 좀 옮겨보겠구먼. 새로 지은 이동지역에서 일할 사람을 뽑는데, 건물을 다 지으면 그 지역에서 계속 유지 관리 일을 맡긴다고 건축 쪽 책임자가 그러더라고.
공고도 이미 붙었고, 며칠 뒤엔 우리를 차로 데리러 온다 그러더군.
그럼 여기 사람들 편지는……
다 나한테 줘. 다들 집에 돌아가면 그때 내가 나눠주면 되지. 여태까지 몇 년 동안 우리 편지를 배달해 줘서 고마워.
……별말씀을요.
거 참, 근데 북쪽으론 또 왜 가는 거야?
석교촌으로 가는 편지가 한 통 남아서요. 그거까진 배달해야 해요.
석교촌?
석교촌은 저번 달에 옮긴다는 얘기가 나왔었는데, 지금 거기 사람이 남아 있나 모르겠네.
화…… 확실한 정보인가요?
그쪽 사람들이 옮긴다는 얘기야 이미 다 못 박아둔 얘기 아니겠나. 차량도 며칠 전에 들어오는 걸 보긴 했는데, 어째 차가 나오는 걸 못 봤네……
그럼 아직 늦진 않았네요.
그냥 가지 말어. 거기 길도 멀고, 사람들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만에 하나 강도라도……
뭐야, 그새 얼로 갔대?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서둘러 가볼게요. 아직 안 늦었을 거예요!
석양이 서쪽으로 질 즈음이 되자, 양측에 산봉우리가 빼곡히 들어선 좁은 길에 들어섰다.
북쪽으로 십여 리를 더 가자 전에 들었던 고목나무가 보였고, 길이 험한 고개를 굽이굽이 넘어가자, 양 갈래 길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는 여기서 마을로 갔지만, 지금은……
…… 실례지만 길 좀 비켜주시죠.
길을 막아서 미안하군, 우린 편지를 받으러 온 건데 말이야.
제 가방에 당신들 편지는 없는데요.
그럴 리가 없는데? 그쪽 가방에 석교촌으로 보내는 편지가 있다고 들었거든. 석교촌은 여기 바로 앞이니, 편지를 나한테 주면 내가 마을로 전해주도록 하지.
괜찮습니다.
쳇, 좋게 말할 때 듣는 게 좋을 텐데.
편지를 우리한테 넘겨. 겨우 편지 한 통이잖아, 꾸물대지 말고 빨리 내놔!
꼭 뺏어야겠다면, 와서 가져가 보시죠.
우리랑 한 번 해보겠다 이거지, 간덩어리가 부었나 보군.
……혹시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나요?
쓸데없는 소리를. 이번엔 우리 보스가 안 계시니 적당히 끝나진 않을 거다!
자세 하나는 제대로 배웠나 보구나, 네 칼날에 피를 묻혀 본 적이 있는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칫!
숨는 거 하나는 빠르구나……
하앗!
젠장, 계집애가 제법이구나!
쫄지 마! 다 같이 덮쳐 버려!
계집이 뭘 모르나 본데, 그깟 편지 하나 주면 그만이지 왜 이렇게 목숨까지 거는 거냐?
하아…… 하아…… 당신들과는 할 말 없어.
(작은 목소리로) 형님, 아무래도 뺏긴 힘들 거 같은데, 지금이라도 그냥……
(작은 목소리로) 쳇, 다른 수가 없겠다.
우리 한 발씩 양보하는 게 어때? 우리도 왜 널 못 지나가게 하려는지 얘기해 줄 테니, 얘길 듣고 다시 우리랑 목숨까지 걸어가며 붙을 가치가 있는지 판단해 봐.
……
그게 누구 편지인지는 알고 있나? 그건 우리 보스가 잡혀간 뒤 보낸 편지다.
보스의 집이 바로 석교촌에 있거든, 석교촌은 진작에 다들 이주해서 사는 사람도 없는 상태다. 석교촌에 어떻게 가는지 네가 여기저기 알아보고 다니지만 않았다면, 우리도 널 지켜보지 않았을 거야.
그 말을 믿으란 건가요.
그럼 어디서 보냈는지도 모르는 편지 하나에 우리와 서로 죽고 죽일만한 가치가 있다 생각하나?
솔직히 말하지. 보스는 잡혀가시기 전에 금은보화를 숨기셨다. 그리고 용문에서 어렵게 편지 한 통을 밖으로 보내신 거고. 그 편지 안에는 분명 그 위치가 적혀 있을 거다.
그러니까 편지를 내놔. 보스가 숨겨둔 보물을 찾게 되면, 네게도 일부분을 나눠주마.
어림도 없습니다.
좋다. 그럼 한 가지 더 알려주지. 우린 널 한 번 살려준 적이 있다. 그때 넌 뿔이 아직 부러지지도 않았고, 등에 칼을 매지도 않았었지.
당신들은?!
생각났나?
당신들…… 내가 처음으로 만났던 강도인가요? 내 눈을 가리고 내 편지를 불태웠던 바로 그 강도들.
그럼 또 누구겠어?
보스만 아니었다면 괜히 귀찮게 하고 싶지도 않았을 거고, 너 같이 집도 없는 계집애를 보면 또 뭔가 불쌍하단 말이지. 관청 사람 하나 죽이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 거 같나?
불쌍하다니…… 뭐가 불쌍하다는 거죠?
하, 우리가 대체 왜 불쌍하다 하겠나?
난다 긴다 하는 도적들은 다 이동도시에서 크게 판을 벌리고 있지. 우리도 집이 없어지지 않았다면 이런 산구석에서 노상강도나 하고 있었겠어?
……
근데 때마침 네가 우리 보스의 편지를 갖고 있으니,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다시 만났는데, 볼썽사납게 난리 피우지 말자고.
(고개를 저으며) 만약 이게 인연이라고 생각된다면, 지금 비켜주시죠.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 거야?
…… 이 칼은 당신들에게 강도질을 당한 뒤에 산 겁니다. 이걸 정말로 당신들에게 휘두르게 만들진 말아 주시죠.
이쯤 하지. 얘들아, 이 계집이 죽고 싶단다. 나중에 우리 탓은 하지 마라.
이 자식이?!
……하아!
저 여자가 가방을 지키고 있다! 등 쪽을 베어버려!
반응 속도 하난 빠르군……
당신들…… 빨리 가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저기 두 사람은 치명상이 아니니 아직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이미 너한테 다 털어놨으니, 우리랑 함께할 게 아니라면 우리도 널 살려 보낼 수는 없다.
네 녀석도 다리에 힘이 풀린 거 같은데. 얌전히 편지를 내놓고 우리랑 같이 가지 그래. 어쩌면 한몫 크게 챙길 수 있을지도 모르니.
꾸…… 꿈도 꾸지 마시죠.
이거 봐, 목소리도 그렇게 떨리는데……
크윽……
이번에 벤 건 팔이지만…… 다음엔 다를 겁니다.
훌륭하군. 전달자 하나가 우리 셋을 쓰러뜨리다니. 하지만 너도 거기까지다. 칼을 내려놔.
칼 내려놓으라고!
무슨 일이지, 조력자가 있었나?!
튀어! 후퇴다!
괜찮으십니까?
전…… 괜찮습니다. 누구시죠?
그 편지……
윈드차임스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죄송합니다 신분증부터 보여드렸어야 했는데. 전 이런 사람입니다.
용문 근위국?
간단히 말씀드리죠. 저희 업무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저와 같이 용문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편지를 검사한 다음 다시 보내려고 합니다.
이 편지가…… 대체 뭔데 이러는 거죠?
그 편지는 체포된 어느 강도단의 보스가 보낸 겁니다. 석교촌에 계신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라더군요.
그 자가 석교촌 사람이란 건 저희도 확인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자가 자백한 첫 번째 범행도 당신을 습격한 건이더군요.
……
그 자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지는 벌써 십수 년이 넘었습니다. 그 자에겐 남은 시간도 얼마 없었기에, 저희도 더 간섭하지는 않았었죠.
십수 년 넘게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고요?
진술하기로는 가족들을 끌어들이기 싫었다고 하는데…… 진짜 이유야 누가 알겠습니까.
불행히도, 당신이 막 도시를 나갔을 때 저희도 갑자기 그 자가 다른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 바람에 저희도 그 편지가 집에 보내는 편지가 아니라 정보를 전달하는 편지일 가능성은 없는지 판단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목적지가 코앞인데요. 그냥 오해였을 뿐이고, 정말 평범한 편지일 가능성은 없나요?
저도 그걸 확인하기 위해 이렇게 당신을 따라온 겁니다.
경관님,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석교촌이고, 왼쪽으로 가면 제 고향입니다…… 거기엔 이미 아무도 없지만요.
석교촌도 조만간 터전을 옮긴다고 하더군요. 저야 제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낼 주소를 알지만, 그 사람은……
……
용문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까요?
이거 참…… 그렇게 용문으로 돌아가기 싫다면, 여기서 바로 편지를 확인해 보는 방법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편지에 수상한 내용이 있거나 제게 뭔가 다른 사고가 생기기라도 한다면, 그땐 당신이 책임져야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 자가 당신에게 강도질을 했었는데도 이러는 겁니까?
그거랑은 상관없어요. 단지……
십수 년 간 집에 돌아가지 않았던 사람이고, 게다가 다신 돌아가지도 못할 사람이니까요…… 전 그 사람이 가족에게 쓴 마지막 편지가 평범한 편지라고 믿어요.
알겠습니다.
그 카메라는 쓸 수 있습니까? 쓸 수 있는 상태라면 검토 과정을 전부 찍어주시죠. 그럼 서로 확인하기도 편할 테니.
……다 됐습니다.
그럼…… 이 편지는……
남자는 편지를 반듯하게 접어 편지 봉투에 다시 집어넣은 뒤, 내 손에 다시 올려주곤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 편지는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산의 건너편도 산이다. 석교촌에서 차량이 출발했대도 나와 마주칠 게 뻔했지만, 발걸음을 지체할 수는 없다.
내가 서둘러 찾아가려는 마지막 수취인은 아직까지 이사 가지 않았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일찍 도착한다면 차라도 한잔하며 담소를 나눌 수 있겠지만, 늦게 도착한다면 뒷모습을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아…… 하아…… 안 늦었네……
거기 아가씬 누구요? 어디 친지라도 배웅하러 오셨나?
아뇨, 전…… 전달자입니다. 용문에서 석교촌으로 보내는 편지가 한 통 있어서요……
용문? 오느라 고생 좀 하셨겠네. 편지 봉투 좀 보여주쇼. 차에 탄 사람 중에 있나 좀 보게.
아이고 이걸 어째, 이 편지 이거 조 씨 할머니 거 같은데.
……설마?!
아가씨 일단 그쪽이 상상하는 그런 건 아니니까 진정하셔. 조 씨 할머닌 무탈하시니까. 근데 아무래도 연세가 좀 있으시다 보니까 눈도 침침하시고 귀도 좀 안 좋으시고 가끔 오락가락하시고 그러거든.
전에도 마을 사람들이 차 오면 바로 출발한다고 그렇게 얘기해 줬는데도, 우리더러 거짓말하지 말라며 무슨 떼쓰는 어린애 마냥 마을에서 안 나가시겠다는 거야 글쎄.
그 편지를 읽으실 수 있으시려나 모르겠네.
……
어쨌든, 편지는 일단 조 씨 할머니께 드릴게요.
……할머니?
거밖에 누구요? 누가 와도 난 안 나간다니까 그래! 이놈이나 저놈이나 이 할망구한테 거짓말이나 하고 말이야! 이동도시가 어쩌고 전화가 어쩌고 도시 간 네트워크가 뭐가 어째? 누굴 속여 먹을라고!
얼야 그놈 자식 속여먹은 거마냥 나도 나가야 된다 속여먹을라 그러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난 안 가!
할머니 전 이사 때문에 온 게 아니라 편지를……
안 가! 때려죽여도 안 가, 난 여기서 기다려야 된다고 몇 번을 말해…… 단 거 안 먹는다니까!
……네?
그쪽은 누구요? 여긴 어떻게 오셨수?
……할머니, 전 전달자고요, 할머니 앞으로 편지가 와서 전해드리러 왔어요. 아드님께서……
내가 글을 몰라서 한평생을 속고만 살았어…… 글을 알면 뭘 해, 글 좀 안다는 얼야 그놈도 그렇게 속아가지고서는……
이 편지는 얼야라는 분께서 보낸 거겠네요.
편지…… 얼야 그놈이 쓰긴 뭘 쓴다고, 생전 편지 한 통 안 쓰던 놈이…… 편지는 무슨 편지여?
그럼 제가 편지를 읽어 드릴게요, 괜찮으시죠?
편지를…… 읽어 준다고?
그래, 어디 한 번 읽어 보쇼.
“엄마, 미안해. 십 년 넘게 집에도 한 번 못 들리고, 편지도 한 통 못 보냈네……”
엄마, 미안해. 십 년 넘게 집에도 한 번 못 들리고, 편지도 한 통 못 보냈네……
행여나 폐가 될까 봐, 무슨 말을 적어야 할지도 모르겠어.
난 나쁜 길을 걸었어. 많은 사람들을 해쳤지. 집을 나와 산 세월 동안, 마치 큰 병을 앓는 사람처럼 멍하니 살아왔어.
다들 길은 스스로 선택하는 거고 자신이 선택해 저지를 잘못이라 하지만, 난 차라리 그때 마을에 왔던 그 장사꾼 때문에, 그리고 그 장사꾼이 가져왔던 아이스크림 한 통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그 아이스크림은 정말 달았는데…… 엄마, 세월이 이렇게나 오래 흘렀는데도 그 맛이 기억나. 포장지에 '아이스크림'이라 적혀있던 그게 어찌나 그리 달고 맛있던지.
예전에 나 대추 좋아했잖아. 근데 그날 이후로는 대추가 아무리 크고 빨갛게 잘 익었어도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서 손도 안 댔어.
그때 어머니께서 나보고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며 혼냈던 기억이 나. 그러다 결국엔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됐는지, 그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서 몰래 도망쳐 나왔지.
처음으로 돈이 생기니까 바로 달려가 아이스크림을 박스째로, 그것도 별의별 맛이 다 들어가 있는 놈으로 샀어. 그렇게 먹다 배탈이 나니 전처럼 황홀할 정도로 달게 느껴지지가 않더라고.
지금 난 일이 좀 생겨서 엄마 얼굴을 보러 돌아가지 못하게 됐지만, 잘 지내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진 마.
행여나 내 생각이 너무 나면, 집 뒤뜰에 대추나무라도 한 그루 심고 나라고 생각해 줘. 봄이 와서 대추나무에 이파리가 돋아나면 내가 깨어났나 보다 생각하고, 가을에 대추가 땅에 떨어지면 내가 먹었다고 생각하고.
대추나무에 난 가시에 찔리시면 내가 또 엄마한테 짜증을 내나 보다 생각하고, 그냥 속이 풀릴 때까지 때려 줘. 욕을 시원하게 한 바가지 해도 되고. 그래도 뿌리는 계속 거기 박혀 있을 테니, 난 딴 데 가지 않고 계속 엄마랑 함께 있는 거야.
그냥 그걸로, 내가 집에 돌아왔다 생각해 줘.
난 그 편지를 마지막까지 읽곤 벅차오르는 울음을 삼키고자 이를 꽉 물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할머니는 몸을 돌리곤 발걸음을 뒤뜰로 터덜터덜 옮겼다.
뒤뜰 한가운데엔 딱 봐도 정성스레 가꿔진, 푸릇푸릇하게 덜 익거나 새빨갛게 익은 대추가 한가득 맺힌 나무가 있었다.
할머니가 나뭇가지 사이를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대추나무에 난 가시가 할머니의 손을 찌르자, 할머니의 주름 가득한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잠시 침묵하던 할머니는 이내 차량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