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따사로운 햇살

따사로운 햇살

오퍼레이터 레코드브릿지

옛 친구 클라라는 캐서린을 찾아와 상조회 모임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클라라가 신경 쓰는 건 비단 모임뿐만이 아닌 듯했고…… 캐서린이 줄 수 있는 도움도 하나만은 아니었다.

등장 오퍼레이터: 캐서린


???

캐서린…… 캐서린!

캐서린

클라라? 대체 무슨 일이야, 이렇게 이른 시간에……

클라라

아, 넌 많이 바쁘니까, 혹시라도 집에 없을까 봐 걱정했거든…… 그래도 일찍 찾아오길 잘했네. 아니었으면 헛걸음할 뻔했어.

캐서린

이미 은퇴했는데 바쁘긴 뭘. 그냥 이번 주에 먹을 음식들이나 좀 사러 가려 했지.

캐서린

너야말로, 상조회는 괜찮아?

클라라

음…… 실은 그 일 때문인데……

클라라

캐서린이 혹시 나 좀 도와줄 수 있을까 해서……

클라라

일단 나도 너랑 같이 잡화점에 갈까? 시간을 그리 오래 뺏진 않을 거야……

캐서린

……그래. 마침 전에 쓰던 게 물때가 잘 안 닦이더라고, 어떤 브랜드의 세제가 좋을지 같이 봐줘.

클라라

아이고, 아직도 올드 행크꺼 쓰고 있는 거야? 거긴 배합을 바꾸는 바람에, 가격이 싸지긴 했는데 효과가 예전만 못하더라고……

캐서린

가게에 도착하면 봐야겠다. 그보다, 네 상조회 일부터 말해봐. 내가 뭘 도와주면 되는데?

클라라

음…… 너도 알다시피, 우리 상조회는 한부모 가정 아이들을 돌봐주고 있잖아.

클라라

원래는 그냥 같이 모여서 시간을 맞췄거든. 연속 근무나 야근이 있을 때, 아이를 시간이 여유 있는 집에 보내서 반나절이나 하루 종일 머물게 하는 식으로 말이야.

클라라

그렇게 몇 년을 해왔는데……

캐서린

벌써 몇 년이 됐구나, 지금까지 해오느라 고생 많았겠네. 예전에 나도 네가 그렇게 많은 아이를 돌볼 수 있는 게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었거든.

클라라

아, 실은 그때 우리 집 존도 상조회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었거든. 도움을 받았으니, 그다음엔 당연히 내가 도와야지……

클라라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나서, 한부모 가정이…… 갑자기 많이 늘었어.

클라라

우리에게 맡겨지는 아이 수도 늘어서, 예전처럼 하다가는 어느 집에서도 아이들을 다 들일 수 없을 거 같아.

클라라

숙제할 자리는 말할 것도 없고, 어떤 집은 애들이 의자에 다 앉지도 못할 정도라니까.

클라라

그래서 이참에 다 같이 돈을 좀 모아서, 적당한 크기에 고정된 장소 하나를 임대하는 게 어떨지 의논하고 있어.

캐서린

돈은 충분하고?

클라라

하아, 사람이 많아진 만큼, 다들 조금씩만 내도 어느 정도는 모을 수 있을 것 같아……

클라라

근데 그 장소를…… 원래 이안이랑 같이 찾고 있었는데…… 사실 우리가, 말다툼을 좀 했거든.

클라라

이안은 벌써 나흘이나 상조회에 안 나오고 있어……


클라라

됐어, 이안, 됐다니까…… 임대인이 임대를 안 하겠다는데, 우리에게 무슨 수가 있겠어.

클라라

다른 곳을 다시 찾아보면 돼……

이안

그 공장 사장 진짜 어이없는 사람이군! 그냥 식당 창고잖아. 들어보니까 지금은 공장 가동도 안 하고 있더구먼, 갑자기 이제 와서 대체 무슨 '다른 용도'가 생겼다는 거야?

이안

아직 임대 계약서에 서명은 안 했지만, 분명히 우리더러 계약금도 내라고 해놓고선……

이안

이제 와서 무작정 임대 안 하겠다고 하면 그만이야?

클라라

하아…… 그래도 계약금은 돌려줬잖아?

이안

난 그게 더 화가 나. 아까도 돈을 네 품에 휙 던져놓고는 미안하단 기색 하나 없이 말이야, 사람을 완전히 무시하는 꼴이라니……

이안

자기가 계약을 어겨놓고는, 확실하게 설명해 주기는커녕, 빈말로라도 사과 한마디 하나 없잖아.

이안

우리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나?

이안

……아니면 혹시, 가격을 올리고 싶었던 건가?

클라라

그런 거 같진 않던데? 올리려고 했으면 말하지 않았을까?

이안

분명히 우리가 먼저 말하길 기다린 걸 거야. 가격을 협상할 때는 보통 먼저 입을 여는 쪽이 손해 보니까, 이번에도 그랬던 걸 테지.

클라라

하아…… 여기가 진짜 마음에 들었던 거야, 이안?

이안

그랬지. 네가……

이안

하아, 아니야. 내 말은, 여기가 위치나 크기 면에서 정말 딱 맞았잖아. 또 우리가 노력을 엄청나게 쏟아부어서 찾아낸 데다가, 힘들게 협의까지 다 했는데……

클라라

그래도 여기는 그 사람의 땅이니까, 그 사람 마음이지…… 더는 물고 늘어지지 말자, 이안.

이안

……

이안

근데 클라라, 너 왜 자꾸 그 인간 편을 드는 거야? 난 너랑 같은 편이라고.

클라라

넌, 넌 당연히 내 편이지. 근데 너랑 나랑 이렇게 떠든다고 해서, 딱히 무슨 방법이 있는 게 아니잖아……

클라라

우리같은 두 늙은이가, 그 사장 양반을 이겨 먹을 수 있겠어? 네가 말하면 말할수록, 나도 짜증이 나는걸.

이안

……

이안

알겠어. 미안해, 클라라. 내가 네 기분을 망쳤네.

이안

나중에 보자.


클라라

……그 뒤로 이안은 상조회에 오지 않았어.

클라라

나도…… 후회가 되더라고. 이안은 날 위해서 화를 내준 건데, 왜 이안한테 그런 말을 했을까……

클라라

내가 너무 체념하고 살았던 거야…… 계약을 파기한 건 그 공장 사장인데, 따지지도 묻지도 못하고 그저 한숨만 쉬고 있으니, 그걸 보고 속 터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

클라라

이전에도 이안은 가끔 내게 뭔가 말하려다 말곤 했거든. 예전부터 내 이런 모습을 보기 힘들어서 그랬던 걸까?

클라라

난 왜 너처럼 못 할까……

캐서린

……클라라, 넌 나처럼 안 해도 돼. 만약 내가 너처럼 상냥했었다면, 린디가 나를 그렇게 원망하진 않았을 테니.

캐서린

적어도 그 애는 조금은 더 잘 지냈겠지, 아마도.

클라라

……

캐서린

봐봐, 클라라. 누구나 자신을 원망하고 싶은 순간이 있는 거야.

클라라

캐서린……

캐서린

좋아. 그래서 오늘 나를 찾아온 건, 그 일을 해결해 달라고 그런 거지?

클라라

아니, 아니야, 그냥……

클라라

다시 한번 그 사장을 만나보려고 하는데, 혹시 나랑 같이 가줄 수 있어? 그러니까…… 뒤에서 날 좀 받쳐줬으면 해.

클라라

이안 말이 맞아. 만약 그 사람이 진짜 흥정을 하려는 거였다면, 그, 그것도 뭐 못할 건 없지. 네가 같이 있으면, 적어도 그 사람이 너무 막 나가거나,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부르진 않을 테니까……

클라라

지금 하이버리 구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 중에 널 모르는 사람은 없잖아.

클라라

좋은 결과만 있으면, 나도 이안한테 사과하러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

캐서린

그럼 초과한 비용은 어떻게 할 건데?

클라라

내가…… 무리한 수준이 아니면, 내가 좀 보태려고 해……

클라라

네가 보기엔 어때? 혹시 민폐가 되진 않을까?

캐서린

당연히 도와줄게, 클라라. '민폐'니 뭐니 그런 소리는 하지 마. 날 무슨 전쟁 영웅처럼 여길 필욘 없어. 난 여전히 네가 알던, 스웨터도 잘 못 뜨는 캐서린일 뿐이니까 말이야.

캐서린

우선 가서 상황부터 보자.


공장 사장

……왜 또 왔어? 계약금도 다 돌려줬잖아. 난 이제 뭐 빚진 것도 없다고.

클라라

제가…… 제가 여쭤볼 게 있는데, 저희가 임대료를 좀 더 드리면 어때요?

클라라

혹시 임대를 다시 고려해 주실 수는 없는지 해서……

공장 사장

……내가 그깟 임대료가 아쉬워 보여?

클라라

……

클라라

그럼 원하시는 금액이 있으시면, 어쨌든, 어쨌든 간에 이야기는 해줄 수 있으시잖아요……

공장 사장

아니, 이 할머니가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공장 사장

임대야 내가 안 하면 안 하는 거지. 기껏 나이 봐서 좋게 말해줬더니만, 지금 이렇게 나오는 건 내 호의를 무시하는 거라고.

캐서린

이게 '좋게 말하는' 거야?

공장 사장

뭐야 또 늙은…… 잠깐, 너 그…… 전쟁 영웅?

캐서린

캐서린 플레처다.

공장 사장

……그래. 그래서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공장 사장

먼저 말해두지, 난 공장을 다시 돌릴 생각이 없고, 너흰 너희와 연대할 노동자들도 없어. 그런데 나를 뭐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공장 사장

똑똑히 말하는데, 이건 내 합법적인 재산이야. 내가 어떻게 쓰든, 이 할머니랑 임대차 계약을 한 것도 아니니, 내 임차인도 아니라고. 법적으로 아무것도 나랑 엮여 있지 않다는 말이지.

공장 사장

게다가 계약금까지 돌려줬잖아, 이미 충분히 양심적으로 한 거야.

캐서린

공장을 다시 돌릴 생각이 없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부터 들어보고 싶은데.

공장 사장

허, 설마 나한테 일자리가 어쩌니저쩌니 말하려는 건 아니지?

공장 사장

진짜 재수도 없지. 이 도시에선 선의를 베풀어봤자 좋게 돌려받는 게 없다니까.

캐서린

듣자 하니, 그쪽도 문제가 있는 거 같군. 어쩌면 서로 이해관계가 맞는 곳을 찾을 수 있을 거 같은데, 만약 그런 거라면 내가 도울 수 있거든.

공장 사장

……왜 날 도우려고 하는 거지?

캐서린

널 돕는 게 노동자들한테도 도움이 된다면야, 도와주지 않을 이유가 있나?

공장 사장

……그래, 그쪽은 마냥 소리만 지르는 돌대가리가 아닌 것 같긴 하네.

공장 사장

하지만 됐어.

공장 사장

일자리 문제 같은 게 신경 쓰이거든, 나중에 이곳으로 와서 컬럼비아인을 찾던가 해.

캐서린

공장을 컬럼비아인한테 판 거야?

공장 사장

아니. 공장이 아니라 건물만. 이 공장은 이미 파산했어.

공장 사장

그쪽은 모르시겠지, '전쟁 영웅' 씨. 전쟁에 이겼다고 해서 나 같은 사람이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거든.

캐서린

건물을 팔 수 있었으면, 건물로 담보를 잡을 수 있었을 텐데.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공장 사장

……아니, 넌 몰라. 그 컬럼비아인들은 내 건물을 안 샀어도 어차피 다른 사람 것을 샀을 거야. 그 녀석들이랑 내가 가격 경쟁 같은 걸 해 봤자, 수익으로 대출 이자도 못 갚을 판이라고.

공장 사장

나는 2년을 버텼어…… 전쟁에서 승리했을 땐 너무나 기뻤지, 결국 내가 다 이겨냈다고 생각했거든.

공장 사장

몇 달은 더 버틸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컬럼비아인이 오고 나선, 그럴 이유조차 없어지더라고.

공장 사장

……당신 생각엔, 과연 내가 월급의 절반만 받으면서 일할 노동자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아? '노동자 대표' 나으리?

캐서린

그럴 순 없어. 의회가 허락하지 않을 테니.

공장 사장

허, '최저임금법안'이니 뭐니, 다 너희가 의회에서 만들고 있는 거잖아……

캐서린

넌 파산해도 공장 건물을 팔아서 번 돈으로, 시골 별장으로 돌아가 편히 살 수 있겠지.

캐서린

그런데 노동자의 임금이 반으로 줄어든다는 게, 과연 그 사람들한테 무슨 의미인지 알아?

공장 사장

……

공장 사장

이런 말 하면 믿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실은 나도 알고 있어.

공장 사장

어쩌면 그런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실패한 걸지도 모르지.

캐서린

아니면 그냥 운이 없었던 걸지도 모르고.

캐서린

하지만 노동자에겐 당신의 불운을 대신 지급해 줄 의무도, 능력도 없어.

공장 사장

……너희 같은 사람들이랑 말하는 건 여전히 싫군.

캐서린

난 별로 싫지 않아. 그래도 당신은 내가 만난 사람 중 최악까진 아니거든.

캐서린

그리고 나도 이 도시 사람들이…… 좀 더 행운을 지급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

캐서린

클라라한테 당신이 불렀던 금액을 물어봤거든. 그쪽도 말했듯, 정말 임대료 때문에 그 빈 창고를 빌려주려던 건 아니잖아.

공장 사장

……나도 당연히 좋은 일을 하고 싶지. 하늘이 허락한다면 말이야.

공장 사장

안타깝게도 하늘이 내게 베푼 호의는 내가 가진 양심만큼 후하진 않더군.

공장 사장

됐어, 이제 와서 너희한테 이런 말 해봤자 뭐 하겠어.

공장 사장

어쨌든, 공장 건물은 이미 팔았어. 알겠지? 다시는 날 찾지 말라고.

캐서린

'도와주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도움을 주질 못한다'…… 그런 마음인 거지?

캐서린

그렇다면, 역으로 내가 제안 하나 하고 싶은데, 한번 들어보겠어? 당신이 아직 원하기만 한다면, 감사를 받을 수 있을 거 같거든.


며칠 후

키 큰 동료

이봐! 캐서린, 여기 끝냈어!

좋지 않은 눈빛의 노동자

뭐야, 네놈이 나보다 빠르다고? 말도 안 돼……

키 큰 동료

하, 맥주 한 잔 내기도 질 수 없다는 거냐?

캐서린

다들 수고했어, 이따가 내가 한턱낼게.

키 큰 동료

안 돼! 진 건 진 거야. 캐서린이 낸다 해도, 쟤는 내게 맥주 한 잔 빚진 거라고.

캐서린

내가 내는 건 내가 내는 거고, 걔가 빚진 건 걔가 빚진 걸로 해.

클라라

내가, 내가 낼게. 버니, 갤빈 그리고 캐서린도…… 이따가 다 우리 집에 와. 내가 대접할게.

키 큰 동료

겨우 이동식 주택 하나 세운 거야, 손짓 한 번이면 끝날 일인데 뭘 그렇게 정중하게 그래, 클라라.

좋지 않은 눈빛의 노동자

맞아, 클라라. 버니한테 맥주 살 바엔 애들한테 간식이나 좀 사주라고.

키 큰 동료

좋아, 그럼 네가 빚진 맥주도 빵으로 바꿔서 클라라한테 주도록 해. 난 괜찮으니 말이야.

클라라

그건 안 되지. 다들 도와주느라 고생했잖아……

캐서린

클라라, 저 둘은 오늘 야간 근무라, 너희 집에 갈 시간이 없어서 그래.

클라라

아…… 그래, 그래. 그럼 다른 날로 해야겠다.

클라라

그럼 캐서린, 너는 시간 되지? 이번 일은 전부 네 덕이야……

클라라

그 공장 사장이 좋은 사람일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어…… 그날 너랑 그 사람이 얘기하는 동안, 난 숨도 못 쉬겠더라니까.

캐서린

좋은 사람이라…… 뭐, 그런 셈이지.

캐서린

하이버리 구에서 빈 땅을 찾으려면 공장밖에 없는데, 그래도 각 공장의 구석에 약간의 자투리땅이 좀 있더라고. 다행히 사장이 공장 건물만 팔고, 땅은 안 팔아서 다행이었지.

클라라

그럼…… 이제 컬럼비아인이 와도, 우린 괜찮은 거지?

캐서린

응, 괜찮아. 그날 오면서 내가 여기를 봐뒀었거든. 여기 땅은 워낙 좁고 구석진 데다가, 애초에 그냥 잡동사니나 쌓아두던 곳이었어.

캐서린

우리가 나중에 저쪽 벽돌 담을 보수해서 작업장이랑 분리만 하면, 서로 방해되지도 않을 거야.

캐서린

게다가 이번엔 임대 계약서에 사인까지 끝냈는데, 뭘 걱정하고 있어. 런디니움에는 지금 이 정도 규칙은 지켜지고 있어.

클라라

역시 캐서린이야. 너라면 해결책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

캐서린

나야 그냥 하루이틀 도운 것뿐이지. 네가 계속 애들 돌보는 수고에 비하면야 별것도 아니야.

클라라

그치만 난 이 나이가 돼서도, 딱히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을 돌보는 것도 사실 내가 외로워서, 그냥 아이들이 곁에 있어 줬으면 해서 그런 거야.

클라라

아…… 내가 또 힘 빠지는 얘기를 했네, 캐서린, 혹시 기분 나쁜 건 아니지?

캐서린

아니야, 난 네가 이런 성격이란 걸 잘 알고 있으니까. 클라라, 난 오히려 네가 대단한걸. 네가 스스로 뭐라고 하든,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클라라

……

캐서린의 예상과는 달리, 클라라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입을 오므리며 조금 억울한 모습을 보였다.

캐서린

아, 이안을 생각했구나. 이안이 화냈던 게 속상한 거지?

클라라

……그런가 봐. 이안은…… 가끔 나한테 뭔가 말하고 싶어 하면서도 결국 말 못 하거든. 내가 모를 줄 아는 건가?

캐서린

네가 이안의 마음을 알고 있듯이, 이안도 당연히 네 마음을 알고 있을 거야. 아마 무슨 걱정이 있을 수도 있지.

클라라

……그날도 내게 무슨 말을 하려던 것 같았는데, 결국엔 말 안 하더라고. 그러곤 며칠이나 화가 나 있으니까, 나도 좀 억울하기도 하고……

클라라

그래도 짜증 난다고 말한 건, 확실히 내가 잘못했지……

클라라

여기를 깔끔히 다 정리하고 나면, 상조회 사람들을 모두 초대해서 모일까 하는데…… 네가 볼 땐, 이안이 올 거 같아?

캐서린

그건 나한테 물어봐도 알 수 없어, 이안한테 물어봐야 알지.


모임 당일

장난꾸러기 아이

와! 클라라! 여기 뭐 좀 심어도 돼요? 선생님께서 저희더러 씨앗이 싹트는 걸 관찰하라고 했거든요. 보세요, 이건 제가 가져온 완두콩이랑 빈 깡통이에요!

침착한 아이

설마 통조림에 들어있던 완두콩에서 싹이 틀 거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장난꾸러기 아이

뭐? 내가 바보도 아니고, 이건 우리 아빠가 잡화점에서 사 온 신선한 완두콩이라고!

장난꾸러기 아이

클라라, 클라라, 심어도 돼요? 네?

클라라

그래, 그래. 저쪽에 흙을 쌓아뒀으니, 조금만 퍼서 심어보렴.

캐서린

아이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혼자 다 돌보는 거야?

클라라

평소엔 이렇게까지 많지 않아, 오늘은 모임이라 다들 온 거고……

클라라

그리고 나 혼자도 아니야, 사람들이 돌아가며 도와주거든.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난 일하러 나가질 않으니 시간이 많잖아. 그래서 좀 더 봐주는 것뿐이야.

캐서린

이안도 은퇴했으니, 도와줄 수 있겠네.

클라라

……

캐서린

왜 그래, 혹시 이안이 안 왔어?

클라라

……안 그래도 그저께 이안 집에 가서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집에 없더라고……

클라라

맞은편 이웃한테 말 좀 전달해달라고 부탁하긴 했는데…… 아직……

클라라

혹시 날 피하는 걸까?

캐서린

……클라라, 이안하고 상의해 볼 생각은 없는 거야?

클라라

상의라니?…… 무슨 상의를 말하는 거야?

캐서린

가정을 꾸리는 거 말이야, 너희 둘이.

클라라

……!

클라라

세상에!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캐서린!

캐서린

물론, 꼭 가정을 꾸리란 말은 아니야. 하지만 적어도 이안에게 네가 좋아한다는 건 알려줘야지. 하루 종일 너 혼자서 싱숭생숭해 있잖아.

클라라

세상에, 캐서린. 나, 난, 너……

캐서린

하아……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거 아니지?

클라라

……내가 이 나이에, 무슨 좋아한다는 말을 해……

캐서린

네가 가만히 말 안 하고 있으면, 뭐 좋은 게 있긴 해? 그리고 말한다고 해서 뭐 손해 볼 게 있어?

클라라

이 나이에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겠어……

캐서린

'이 나이'라고 해도, 머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가슴이 안 뛰는 것도 아니잖아. 이안과 함께 있고 싶고, 이안의 일에 관심을 두게 되고, 못 보면 우울하고…… 그건 분명하잖아?

클라라

남들이 수군댈 거야……

캐서린

남들이 뭐라고 할 수 있는데? 너랑 이안이 상조회에서 요 몇 년 동안 무슨 일을 해왔고 어떤 사람들인지, 모두 알고 있잖아.

클라라

아이를 돌보는 건 좋은 일이지만, 이건 다르잖아. 얼마나 남부끄러운 일이야……

캐서린

……

클라라

아, 캐서린, 네 말을 부정하려던 건 아니야. 난 그냥…… 그냥 스스로가……

캐서린

스스로가 '남부끄럽다'는 거야?

캐서린

난 널 알아. 넌 언제나 진심으로 사람을 대했고, 이안에게도 마찬가지였어.

캐서린

진심이 어떻게 부끄러운 거겠어.

캐서린

나도 우리가 '이런 나이'가 됐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뭔가를 해야 할 때, 서둘러서 해야 한다고 생각해.

캐서린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도 모르잖아, 뭘 더 망설일 게 있겠어?

클라라

……그렇지만, 그렇지만 이안이 아직도 나한테 화나 있으면 어떡하지……

캐서린

이안이 어떤 성격인지, 네가 모를 리 없잖아? 너랑 똑같이 착한 사람이야. 어떻게 지금까지 너한테 계속 화가 나 있겠어.

캐서린

설령 오늘 안 오더라도……

캐서린

아, 왔다.

이안

후우…… 후우……

클라라

이안, 이안!

클라라

이안…… 왔구나?

클라라

왜 이렇게 급하게 왔어……

이안

바디가 오늘 아침에야 말해줬거든……! 게다가 히죽히죽 웃으면서 “하마터면 잊을 뻔했네, 클라라가 또 너 찾더라” 이러는 거 있지……

이안

그 영감탱이 정말!

클라라

나는 네가 아직도 나한테 화난 줄 알았어……

이안

……그날은 좀 화가 나긴 했어.

이안

난…… 에휴, 됐어.

캐서린

'됐어'는 무슨. 맨날 네가 말도 안 하고 꾹꾹 삼키니까 클라라가 마음 졸이는 거잖아. 요 며칠 동안 클라라가 얼마나 힘들어했는데.

이안

……

이안

난, 에휴…… 내가 상조회를 꼭 여기서 열었으면 했던 건…… 그건 클라라가 제일 자주 아이들을 돌봐주고 있기 때문이야.

이안

다른 곳들은 다 클라라 집이랑 너무 머니까……

이안

혹시라도 나중에 아이들이 전부 그런 먼 곳으로 가게 되면, 클라라가 매일 오가는 데 시간을 얼마나 써야겠어? 게다가 다리도 안 좋은데, 그 먼 길에 넘어지거나 부딪히면 또 어떡해?

이안

난…… 난 그냥 클라라가 걱정돼서 그런 건데, 오히려 짜증 난다는 말을 들으니까……

이안

좀 속상했지.

클라라

아…… 이안……

클라라

미안해…… 이안, 미안해! 나 원래 자주 말실수하는 거 알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어……

이안

에휴, 당연히 알지. 이튿날에 바로 화도 다 풀렸었어.

클라라

그러면 그동안 왜 상조회엔 안 나온 거야?

이안

……며칠 동안 밖을 좀 돌아다녔지. 돈을 좀 더 마련한 다음에, 그 사장한테 가서 다시 얘기를 해볼 수 있는지 물어보려 했거든……

이안

근데 오늘 바디랑 얘기하다가, 너랑 캐서린이 이미 다 해결했다는 걸 알게 된 거야.

이안

캐서린이 딱 나서니까, 그 자식도 제멋대로는 할 수 없었나 보지?

캐서린

그건 네가 '제멋대로'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긴 한데.

캐서린

아 맞다, 이안. 클라라가 너한테 할 말이 있는 것 같더라.

클라라 & 이안

아……

이안

클라라……?

클라라는 자기도 모르게 외투 자락을 꼭 쥐었다.

순간, 캐서린은 오래 전의 클라라를 다시 본 것만 같았다.

그날도 클라라는 그렇게 하얀 치맛자락을 꼭 움켜쥔 채, 말을 더듬으면서도 그 세 글자를 꺼냈었다.

이제 눈앞의 클라라는 주름이 가득 진 얼굴이지만, 그 표정만큼은 마치 40년 전, 하얀 치마의 소녀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클라라는 입을 뗐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분위기가 조금씩 무르익어가려 하는 그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클라라

음…… 이안.

클라라

캐서린이 아까 나한테 말하더라고…… 아니, 아니야. 이건 캐서린이 나한테 하라고 한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클라라

이안, 우리 서로의 반쪽이 되어주는 건…… 어때?

이안

……우리…… 뭐라고?

클라라

있잖아, 넌 맨날 날 도와주잖아? 난 네가 참 좋다고 생각하는데…… 너는 날, 어떻게 생각해? 만약 너랑 나랑…… 다면?

이안

클라라…… 세상에……

이안

네 쪽에서 먼저 말하게 만들다니…… 에휴, 나, 난 계속…… 네가 분명…… 분명 부담스러워하는 줄 알고……

이안

세상에, 클라라! 정말 상상도 못 했어, 네가…… 원할 줄은……

이안

나도 당연히, 당연히 네가 너무 좋아!

둘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서로의 손을 꼭 맞잡았다.

아이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자, 캐서린은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흐린 날이었다. 그런데 캐서린은 한 시간 전보다도 하늘이 더 밝아진 것 같다고 느껴졌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은 아침이니까.

해는 앞으로 더 높이 떠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