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바람의 겨울 숲
그레이스는 이번 난민 구조 상황이 상상 이상으로 복잡하다는 것을 느꼈다. 무관심한 귀족들, 지지부진한 구원…… 그녀만의 고군분투로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등장 오퍼레이터: 브리즈
있잖아, 율로지……
200명의 라이타니엔 난민 대열을 따라나서고 나서……
벌써 며칠이나 지났는지 이젠 나도 모르겠어.
라이타니엔의 국경 지역은, 재앙으로 일어난 지진 때문에 강의 제방이 터지면서 물바다로 변했어.
터전을 잃은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높은 지대로 도망치다 이곳까지 왔어.
겨울이 곧 다가오는데,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려 우린 오도 가도 못하고 있어.
할 수 있는 거라곤 나무를 쌓아 만든 바람이 새는 임시 대피소에서 구원을 기다리는 것뿐이야.
지금 우리는 빅토리아 북서쪽, 쉐라그 산 근처에 머물고 있어. 이곳은 모든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야.
날씨는 점점 추워지는데 먹을 것은 부족하고, 추위를 막을 옷은 없고, 약도 벌써 다 떨어졌어.
있잖아, 율로지…… 상황이 내 예상과는 달리 너무 안 좋아…… 저 인도주의자들은, 베풂을 좋아하던 남작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버지……
우리는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점점 죽어가고 있어…… 이 끝이 보이지 않는 소멸 속에서.
빅토리아 북서쪽 변경 지역, 숲속
(누군가 나를 따라오는 것 같은데.)
(흥흥, 어딜 감히!)
(으음……)
앗, 이 발자국은……!
잡식성 짐승들은 송곳니는 그리 크지 않지만 날카로운 발톱을 가지고 있어. 때문에 사냥감을 갈가리 찢은 후에 먹어 치우지.
평소에는 사람을 공격하지 않지만, 겨울에 먹을 게 부족해지면…… 홀로 있는 인간을 사냥하기도 해……
아아악!
으아아악!
그레이스 언니!!
으아앙, 날 혼자 내버려 두지 마!
역시 리타였구나. 얼른 와.
언니!! 저쪽 수풀에서 기척이 느껴졌어!! 짐승이 분명해. 우리 여기에서 죽는 거야?
하하하, 겁내지 마. 방금은 내가 마음대로 지어낸 거니까.
누가 몰래 뒤따라오나 했더니 그게 너더라구.
흐흑……
언니, 겁주지 말란 말이야!
그런 짐승은 없지만 이렇게 몰래 따라다니는 건 확실히 위험해.
말해봐, 왜 날 따라다니는 거야?
……
배…… 배고파서……
먹을 걸 찾으려고 날 따라다녔다고? 그런 것치곤 엄청 생생해 보이는데?
엄마 아빠가 먹을 게 없단 말이야. 마지막 남은 식량을 모두 내게 주셔서……
……
채집팀에 부탁하면 될 텐데?
엄마는 오래전부터 아프셨어. 아빠가 사냥하다 다치신 뒤로 채집팀에서 우리 가족은 차출할 인력이 없다며 먹을 것을 나눠줄 수 없다고 했어……
그리고 지금은 겨울이라 먹을 것을 찾을 수 없다고 했어. 캠프의 식량도 부족하다고…… 날이 따뜻해지지 않는 한 식량이 점점 부족할 거래.
(맞는 말이야.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어.)
(구조대가 빨리 오지 않는다면 그때는 아마……)
그리고…… 내가 채집팀을 따라가도 사냥에 도움이 안 된다며 아무것도 주지 않는걸. 그래서 요 며칠은 채집팀에 가지 않았어……
그 말이 사실이야?!
흐흑…… 엄마 아빠는 아파서 누워 계시는데 춥고, 배도 고프고…… 너무 힘들어.
언니, 먹을 수 있는 게 어떤 건지 가르쳐 줄 수 있어? 좀 가져가려고……
잡초도 되고, 맛없는 것도 괜찮아. 배만 채울 수 있으면 돼!
……
그래, 나한테 맡겨! 하지만 길가에서 캘 수 있는 것만으로는 안 돼. 든든히 배를 채우려면 고기도 먹어야 해.
사방을 돌아다니며 채집해봤자 멀리 보면 소진한 체력을 회복하기에도 역부족이야.
하지만 난 사냥할 줄 모르는걸.
으음…… 오늘은 어쩔 수 없으니까 급한 대로 먹을 것을 찾아보자. 내일은 북쪽으로 데려가 줄 테니 작은 동물들을 사냥해 봐!
정말? 고마워, 언니.
다행이다. 그럼 엄마 아빠도 배불리 드실 수 있을 거야!
감사 인사는 나중에. 대신 오늘 내 말 잘 들어야 해, 말썽부리지 말고. 알겠지?
응, 알았어!
앗, 발밑 조심해! 넘어지지 않게.
헤헤……
이제 먹을 수 있는 산나물부터 찾아볼 거지? 엄마 아빠가 먹을 걸 기다리고 계시거든!
아, 이건 산나물처럼 생겼네…… 언니, 이건 먹을 수 있어?
으음…… 이건 먹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독성이 있어.
어, 그럼 이건?
이것도 안 돼. 씹기 힘들어서 입에서 피가 날 수도 있어.
이거! 이 열매, 무척 싱싱해 보이는데 먹을 수 있는 거야?
이건 치스티아이야. 치스티비스트의 눈처럼 생긴 베리의 일종이지.
먹음직스럽게 보이고, 단맛도 나지만 먹으면 안 돼. 배앓이를 하게 돼서 먹으면 먹을수록 기력이 빠지게 될 거야.
빅토리아의 일부 귀족들은 다이어트용으로 쓰기도 하지만, 먹을수록 피로가 쌓이고 면역력이 떨어져서 온갖 질병에 시달리게 돼…… 아무튼, 배도 안 부르고 몸에도 좋지 않아.
그래도 다른 동물에게 배앓이를 유도해서 씨앗을 퍼뜨리는 것은, 정말 흥미로운 진화 방법이지.
힝…… 어떡해?! 먹을 만한 게 전혀 보이지 않잖아.
걱정할 것 없어. 열매는 먹을 수 없어도 잎은 먹을 수 있거든. 좀 쓰긴 하지만 몸에는 해롭지 않아. 그리고 삶으면 쓴맛을 조금 줄일 수도 있어.
그럼 저걸 좀 따가면 되겠다.
흐음, 우리 운이 좋은 것 같은데! 이것 봐, 이것도 먹을 수 있는 거야.
이건 돌멩이잖아?
돌 표면을 봐봐. 이건 야생 모쏘앗이야. 씨는 보리 이삭과 비슷해서 먹을 수 있어.
책에서 우르수스 북툰드라 지역의 농민들은 이걸 심는다고 보긴 했는데, 여기에도 있을 줄은 몰랐어.
잘 됐다, 이것도 딸래!
많이 따. 껍질을 벗기고 잘 씻어서 죽을 끓이면 되니까.
그런데 이걸 다 따버리면 나중에 먹을 게 없지 않을까?
모쏘앗은 수확기가 매우 짧아. 수확기가 지나면 당분이 흡수되는데, 이때 위쪽의 포자 구조 즉, '보리 이삭'은 알이 차지 않게 되고 쓴맛이 나서 먹을 수가 없어.
그럼 이건 먹을 수 있는 모쏘앗이야?
응, 리타는 운이 정말 좋구나! 하지만 이건 야생 모쏘앗이라 양이 많지 않아서, 전부 딴다고 해도 죽 한 냄비밖에 끓일 수 없을 거야.
그럼 나 열심히 딸게.
기특하네. 좋아, 나도 도와줄게!
고마워, 언니. 잔뜩 따놨다가 몰래 숨겨놓고 엄마 아빠만 줄 거야!
모쏘앗을 다 캐고 나면 언니 약초 캐는 것도 도와줄게!
좋아, 너무 멀리 가지 말고 넌 평지 쪽에 있어. 난 서쪽으로 갈 테니까, 일 있으면 불러!
응, 언니 말대로 할게!
(비가 오네……)
(추워. 바위 표면이 미끄럽게 변했어.)
(돌아가서 리타를 찾아봐야겠다.)
리타……!!
나…… 여기…… 있어……
(왜 멀리서 들리는 것 같지?)
리타? 어디 있어?
아래…… 아래에 있어……
어?!
실수로…… 실수로…… 미끄러…… 떨어지고 말았어……
!!
다친 데는 없어?!
가만히 있어, 내가 내려갈 테니까!
언니…… 조심……
으아아앗!
앗, 그쪽은 미끄럽다고 알려주려고 했는데…… 돌을 밟는 순간 파바밧 하고 미끄러질 수 있다고……
무슨 구덩이가 이렇게 미끄러운 거야!
하하하, 언니 머리에 새싹이 났네?
으응? 너도 당해봐, 이얍!
하하하, 수염이다!
에…… 에, 엣취! 히잉…… 언니가 나뭇잎을 뿌리는 바람에 코에도 붙었잖아. 간지러워!
풉! 너, 콧물 흘러!
으응……
아하하하핫!
자, 장난은 여기까지. 그런데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야?
위에는 모쏘앗이 없더라고. 아래에 있는 것 같아서 따려다가 그만……
미끄러져서 쿵 하고 떨어지고 말았어!
다치진 않았고?
엉덩이부터 떨어져서 조금 아프긴 해도 다친 데는 없어.
후우, 그럼 다행이다.
그런데 너 내 말 잘 듣겠다고 하지 않았어? 난 널 여기에 오라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하지만 냄비 하나로는 부족하단 말이야. 게다가 내일 왔을 때 수확기가 지났으면 어떡해? 너무 아깝잖아.
그래도 조심했어야지.
응…… 그래도 바구니는 위에 뒀으니까 걱정할 것 없어!
방금 봤어. 그래서 나도 거기에 바구니를 두고 왔지.
리타 바구니 옆에?
응, 바로 옆에.
헤헤헤, 잘 됐다.
비 온다. 이거 써. 안 그러면 감기 걸릴 거야.
엄청 큰 이파리네!
방금 꺾은 거야. 머리에 쓰고 네 뿔을 여기 구멍에다 끼우면 비를 피할 수 있지.
귀가 차가운 게 좀 불편해.
그래도 벗지 마. 비에 젖으면 감기 걸린단 말이야. 네가 아파서 쓰러지면 누가 부모님을 돌봐드리겠어?
응, 리타는 지금 우리 가족의 기둥이야! 엄마 아빠가 배불리 드실 수 있도록 힘낼 거야!
그런데……
언니는 왜 이파리 안 써?
너부터 써.
좀처럼 비에 젖은 적이 없어서 그런지, 색다른 기분이 들어.
말도 안 돼. 어떻게 지금까지 비에 젖은 적이 없을 수 있어?
빅토리아는 비가 잘 내리지 않는 곳이야?
아니, 오히려 비가 잦은 지역이야. 다만 내가 비에 젖을 일이 거의 없었을 뿐이지.
그런데 지금은 가을의 마지막 비가 거침없이 내 머리 위로 내리고 있어……
그럼 내가 언니보다 센 거네! 난 비 오는 날에도 빨래를 개거나 농사일을 도왔거든!
비에 젖는 건 촌장님한테 잔소리 들을 때랑 비슷해. 리타를 혼낼 때마다 푸흐흡, 푸흐흡 하며 침을 엄청 튀기시거든!
하하하, 확실히 촌장님은 흥분하시면 침을 튀기시지.
하지만 이제는 그러시지도 못해……
연로하시고 체력도 예전만 못하시니깐.
나 다 봤단 말이야. 그날 몰래 따라갔다가 그레이스 언니가 촌장님을 등에 업은 채 먼 곳까지 힘겹게 가는걸…… 언니가 촌장님을 내려놓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촌장님이……
나무를 태울 때 날리는 재처럼 되어버린 것을……
우리 엄마 아빠도 그렇게 되는 걸까?
……
구조 요청을 하러 간 소대가 출발한 지도 2주가 지났어. 내가 그린 지도대로라면 근처 마을에 이미 도착했을 거야.
게다가 오늘 약초도 많이 땄고 리타도 먹을 걸 많이 찾았으니, 리타 부모님은 분명 괜찮으실 거야!
맞아! 리타가 이렇게 노력했으니까 엄마 아빠는 반드시 좋아질 거야!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왜 언니가 약초를 캐는 걸 도와주지 않아?
음…… 모두들 리타네 집과 비슷한 사정이거든. 배불리 먹을 수 없으니 지금은 식량을 챙겨두는 게 가장 중요하거든.
그래서 날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거야.
비가 점점 많이 내리네. 부모님이 걱정하실 테니 먼저 돌아가. 필요한 약초는 혼자 캐면 되니까.
응응! 캐 놓은 걸 먼저 가지고 갈게. 엄마 아빠 모두 무척 배가 고프실 거야.
돌아가는 길 알아?
당연하지!
위로 올려줄게. 조심해.
읏차!
올라왔다!
이번엔 언니가 내 손을 잡아, 내가 끌어올려 줄 테니까!
하하하, 언니는 너보다 훨씬 무거워. 그리고 난 혼자서 올라갈 수 있으니까 안심하고 얼른 가서 엄마 아빠 돌봐드려!
알았어~
넘어지지 않게 천천히 가!
응~
으음…… 이제부터 내 문제를 좀 해결해 볼까.
방금 쓸 만한 약초를 봤었는데, 저쪽 절벽 위였지.
이 구덩이쯤은 간단하게 오를 수 있지만, 저쪽 절벽은…… 비도 오는데 가능할까?
아, 아파! 아까 미끄러지면서 발목이 까졌나 보네. 상처도 큰데 우선 지혈부터 해야겠다.
하지만 붕대를 하면 몸놀림이 둔해져서 절벽에 오르기 더 힘들 텐데.
으윽! 발목이 너무 아파…… 머리도 좀 어지러운 것 같고, 요새 무리했나?
리타의 어머니께서 병세가 안 좋으셔. 아버지께서도 외상을 입으셨지. 응급처치를 하긴 했지만 상처가 감염될 수도 있어.
그건 그렇고, 난민이 영지에 들어왔다는 걸 귀족들이 모를 리 없는데 왜 가만히 있는 거지……? 추방한다고 해도…… 모습은 벌써 드러냈어야 하는 거 아냐?
난민들이 들고 온 의료 용품은 다 쓴 지 오래고, 지금은 내가 캔 약초로 간단한 치료만 하고 있어. 더 많이 캐면 좀 더 도움이 되겠지!
사람들이 구조대를 데려올 때까지만 버틸 수 있다면, 그리고……
아아, 쓸데없는 생각할 때가 아니야. 비가 거세지면 절벽에 오르기 더 어려워질 거야. 빨리 약초를 캐서 내려온 뒤에 다시 붕대를 감아야겠어!
빅토리아 북서쪽 변경 지역, 난민 캠프
한스네 줄 해열제,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피터한테 줄 치통약…… 통증만 없애주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는 부족하겠는걸.
구충제…… 앗, 약초 하나를 빼먹었잖아! 배가 고파서 정신이 없었나 보다. 이따 다시 나가서 캐와야 하는데…… 해가 진 데다 비도 꽤 오니……
응? 내 막사 앞에 누가 있는 거지?
그레이스 씨!
그레이스 씨!!
나 여기 있어! 무슨 일이야?
드디어 오셨군요! 사, 사람이 갑자기 쓰러졌어요!
뭐?!
(설마 또 촌장님처럼 그런 건 아니겠지?)
어디야, 얼른 앞장서!
여깁니다, 여기.
여긴……?
리타네 막사?!
……
리타? 괜찮은 거야?
……
반응이 없어…… 손바닥의 화상, 팔뚝의 멍, 뒤통수에는 혹까지…… 으음…… 열도 나고 있어. 분명 아까까진 괜찮았는데……
언제 발견한 거야?
방금요. 한 20분 전쯤?
리타네 막사에는 무슨 일로 왔지?
어, 그, 그게……
리타네 부모님은 치료 구역에 있어서 리타 혼자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을 거야. 넌 여기에 뭐하러 왔어?
아, 그게…… 그러니까 오늘 리타가 채집팀을 따라오지 않아서 무슨 일이 있는지 살펴보러 온 겁니다.
거짓말! 리타는 채집팀에서 먹을 걸 주지 않아 지난 며칠 내내 채집팀을 따라다니지 않았다고 했어!
리타가 신경 쓰였다면 진작 왔었겠지, 지금이 아니라!
오늘 리타가 채집한 식량은? 왜 막사 안에 없지? 당신이 뺏은 거야?
……
우, 우리 식구도 살려면 어쩔 수 없었다고! 이대로라면 굶어 죽고 말 거야!
이, 이렇게 심하게 반항할 줄은 몰랐어…… 이럴 줄은 몰랐다고……
빅토리아의 귀족들이 수수방관하지만은 않을 거야. 우리가 구조 요청을 보낸 소대도 이미 근처의 마을에 도착했을 거라고!
설령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우리 애들은 그때까지 못 버틴다고!
아무리 그래도 어린 소녀가 힘들게 구한 걸 빼앗는 게 정당화될 순 없어! 이건 리타가 힘들게 캔 거라고.
손바닥의 화상…… 음식을 빼앗길까 봐 뜨거운 냄비를 맨손으로 움켜쥐다 생긴 거겠지?
팔뚝의 멍…… 이건 당신한테 잡혔을 때 생긴 것일테고.
뒤통수에 난 혹도…… 역시 당신한테 밀쳐져 어딘가에 부딪히면서 생긴 거겠지?
나, 난…… 일부러 다치게 하려던 게 아니라……
리타네 부모는 살 가망이 없어! 리타가 살아남는다고 해도 그게 뭐? 결국에는…… 고아가 될 거라고! 모든 게 좋아진다고 해도 아이 혼자서 살아갈 순 없잖아!
하지만 내 아이들과 난 아직 건강해! 앞날이 뻔한 리타보다는 가족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는 우리가 더 중요하다고!
그래? 당신 눈에는 생명에도 무게의 차이가 있나 보네……
그럼 난 어때? 당신의 눈에 내 생명의 무게는 얼마나 되지?
당신들은 줄곧 나와 내 율로지를 관찰하며, 내 신분에 대해 수군거렸잖아.
그러니 말해봐. 당신의 눈에 내 생명의 무게는 얼마나 되는지?
죄, 죄송합니다! 당신은 아픈 저희를 치료해 주고, 또 구해주셨습니다. 누군가 당신을 빅토리아의 귀족일 거라고 했는데…… 그러니까 당신은 우리 중 가장 존귀한……
그렇다면 당신의 식량을 내게 내놔야 하는 거 아냐? 내가 살아가게 말이야.
나도 배불리 먹은 게…… 아주 오래전이거든!
……그, 그건……
하지만 당신은 내게 먹을 걸 주고 싶지 않지?
당신의 행동에는 그 어떤 논리도, 이치도, 정당성도 없어. 당신은 그냥 이기적인 거야!
난 이기적인 것들은 질색이야. 강도 따위를 도울 생각은 더더욱 없어.
그래도 내게 이 일을 알린 걸 봐서 한 번 더 기회를 주지……
먹을 걸 리타에게 돌려줘, 하나도 빠짐없이! 이미 먹었다면 채워놔! 안 그러면 구조대의 차량에 네 자리 따윈 없을 테니까!
예…… 예, 알겠습니다.
……
하아, 나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엄청난 거짓말을 술술 둘러대다니…… 그래도 통했으니 됐지 뭐.
리타……
영양실조, 고열, 외상에다 염증까지.
미리 지어둔 이 해열제는 리타에게 써야겠어. 부족하면 나중에 약초를 더 캐서 치료 구역의 환자들에게 보내주는 수밖에.
흑흑…… 엄마 아빠 드릴 거예요. 가져가지 마세요……!!
리타! 나야, 그레이스. 네 약을 달일 냄비만 잠깐 빌리는 거니까 무서워하지 마.
이 약을 마시면 몸이 한결 나아질 거야.
음식…… 엄마 아빠…… 드려야 하는데…… 빼앗겨서……
괜찮아, 음식들은 돌아올 거야. 이젠 나만 믿고 푹 쉬어.
으응……
자, 먹기 좋게 식혔으니까 입 좀 벌려봐.
아……
잘했어, 리타! 입가에 묻은 거 닦아줄게.
조금 지나면 좋아질 거야. 일단 한숨 자. 난 다른 약을 좀 가져올게!
……
……
쌔근…… 쌔근……
벌써 잠든 건가? 약효 한번 빠르네…… 얼른 돌아올 테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와아, 비가 엄청 내리잖아…… 게다가 깜깜해……
서둘러야겠어. 꾸물거리다간 아무것도 안 보일 거야!
발목이 너무 아파……
찾으려던 약초가 이 근처에 있었는데…… 화살 모양의 잎사귀…… 위에는 작은 톱니가…… 앗, 이건가?
됐다! 잘 씻었으니까 가루로 만들어야겠어!
으음……
조금만 힘을 줘도 어질어질하네……
조금만 더 버텨줘, 제발!
그다음은 약초의 조합 비율.
이런, 땔감이 부족하네!
온도…… 땔감을 좀 더 주워와야겠어.
으윽……
리타, 리타…… 무서워할 것 없어. 약을 먹여줄 건데 조금…… 뜨거울 수도 있어.
아, 약초의 씨를 골라내는 걸 깜빡했네…… 아마 많이 쓸 거야.
외용약은 이미 붙였어. 이건 소염제고, 마시면 금방 좋아질 거야.
내가 꼭 낫게 해줄게……
(힘겹게 삼킨다.)
후훗, 리타는 정말 착하구나!
……어지러워…… 안 되겠어, 조금 쉬어야 할 것 같은데……
리타……
리타…… 리타…… 반드시 꼭……
그녀를 발견했을 때 이미 이 상태였어요. 그리고 계속하여 리타라는 이름을 중얼거리고 있었구요.
온몸이 진흙투성이에 다리 쪽엔 상처가 있었어요. 경미한 광석병 감염 증상을 보이는데, 혹시 감염된 지 얼마 안 된 건가요?
그리고 광석병 감염 역시 원인 중 하나겠지만, 그녀가 쓰러진 건 아무래도 배고픔과 극도의 피로 때문인 것 같아요.
벌써 며칠째 혼수상태래요. 일부 난민들은 이 소녀가 자신들을 지켜줬다고 했어요. 소녀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살아남지 못했을 거라더군요.
난민들은 건강만 회복하면 일할 수 있으니 라이타니엔의 구르크 씨에게 치료와 숙소를 부탁하면 될 것 같아요. 마침 구르크 씨도 그 이상한 성을 지킬 인력을 찾고 계시거든요.
삶의 터전을 잃고 갈 곳이 사라진 대부분의 난민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어요. 우선 구르크 씨에게 치료를 받은 후에 상황을 보면서 고향으로 돌아갈지 말지를 결정할 거래요.
난민들을 그들의 나라로 돌려보낸다는 정당한 이유도 있으니 관련 귀족들도 방해하지 못할 거예요.
리타라는 아이……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장애를 입은 아버지는 그래도 계속 일할 수 있다고 들었어요.
근처의 재앙정보전달자가 그러는데 로도스 아일랜드 본함의 어스스피릿 씨와 구르크 씨가 아는 사이라고 해요. 그래서 저는 어스스피릿 씨한테 편지를 써 리타 부녀가 구르크 씨의 영지에서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하려고요.
불포족 돌팔이 의사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약초나 좀 캐고, 약간의 임상 이론을 아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광석병을 억제할 수는 없어.
그녀는 난민을 구하는 일을 너무 쉽게 본 것 같군. 그렇게 단순하게만 생각하다간 언젠가는 목숨을 잃게 될 거야.
이따가 근처의 전달자에게 연락해줘. 로도스 아일랜드와 토룬 앞으로 편지를 보내야겠어.
……
이 말씀은 꼭 드려야겠어요. 빅토리아의 일부 귀족들은 영지를 차지하기 위해 난민들이 이곳에서 죽기를 바랄 거에요.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라도 저희는 공식적으로 로도스 아일랜드를 대표해선 안 돼요.
……로도스 아일랜드?
더군다나 당신은 빅토리아의 의학 세미나에서 몰래 빠져나왔잖아요. 긁어 부스럼 없도록 최대한 조심히 행동하시는 게 좋아요.
내가 참가한 게 학술 세미나였어? 난 지난 며칠 동안 내가 두린족 모사 애호가들이 개최한 술 품평회에 참가한 줄 알았는데.
흥, 일부 귀족에게 인도주의는 단지 일종의 트렌드이자, 유행에 불과해. 그들이라면 이해득실을 따진 뒤에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 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아요.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합병증에 걸릴 수 있고 광석병 감염 속도도 더 빨라질 거예요.
내 조수라고 한 뒤에 빅토리아에서 최고의 치료를 받게 하면 될 거다.
물론 우리의 진짜 정체는 계속 비밀로 해 두고, 어떤가?
조수요? 혹시 계속 곁에 두시려는 건가요?
내가 무슨 낙하산 타고 내려온 빅토리아 유모도 아니고.
그녀가 건강을 회복하면 전문 기관에 연락해 메딕 아츠 수업을 듣게 할 생각이야. 그리고 난 다른 할 일이 있어.
설령 그녀가 이후에도 계속하여 예전처럼 산다고 해도 난 말릴 생각이 없어.
그녀가 의료 행위를 하다 광석병에 걸린 건 어쩔 수 없다 쳐도, 계속해서 돌팔이 의사로 놔둘 순 없잖아. 적어도 자신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는 배워야 해.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그녀 스스로가 결정할 일이야.
마음대로 하세요. 참, 스카우트 씨가 임무를 마치는 대로 전 그쪽 소대에 합류할 거예요. 한동안 빅토리아인이 당신 곁에 있으면서 당신을 케어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죠.
불쌍한 불포……
그녀는 환자를 치료할 땐 너보다 과감하더군.
네, 게다가 광석병 외의 환자를 치료할 때 내린 처방은 정말 효과적이었어요.
……
대충 알 것 같아요.
착하고, 강인하고, 정직한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실력까지……
당신은 그 어떤 가능성을 지켜주고 싶은 거군요.
아, 저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지켜보고 싶어요. 아쉽게도 전 그녀가 깨어나기 전에 로도스 아일랜드로 돌아가야 하겠지만요.
로도스 아일랜드……?
용감한 불포 씨, 얼른 쾌차하세요.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요…… 저도 당신의 성장을 지켜볼게요.
지금은 제 말이 안 들리겠지만요, 하하하……
당신의 미래를 보고 싶어요, 불포 씨.
인연이 있다면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로도스 아일랜드나, 아니면 다른 곳에서……
로도스…… 아일랜드……
있잖아, 율로지……
로도스 아일랜드에 온 뒤 나는 그 햇살처럼 따뜻한 목소리의 주인을 찾지 못했어.
어스스피릿 씨와 구르크 씨가 아직 서로 연락하고 있어서, 리타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는데…… 잘 지내지는 못하나 봐. 그래도 배는 곯지 않는다고 해.
난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바쁘지만 보람찬 나날들을 보내고 있어. 매우 뛰어난 의사, 학자들과 중요한 과제를 끊임없이 진행하고 있거든.
율로지…… 이렇게 제멋대로인 날 받아줘서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나……
광석병에 걸렸어.
나는 광석병이 만연하는 이 땅 위에 서 있어……
언젠가는…… 언젠가는 그 끝을 볼 수 있기를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