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의 여정
어둠의 기사에게 도전했지만, 거절당한 전사는 그녀가 반드시 자신의 도전을 받아들이게끔 만들겠다고 결심했고, 쉐라그 곳곳을 돌아다니며 어둠의 기사의 '비밀'을 찾아다니고 있다.
등장 오퍼레이터: 데겐블레허
쉐라그의 어느 술집 테라스, 한 기사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요, 요 며칠 눈보라가 심하게 치는데, 계속 테라스에서 추위에 떨고 있지 마세요.
……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여행 와서 계속 한숨만 쉬는 겁니까?
……아, 별일 아니야.
쉐라그에 온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매일 거리에 나설 때마다 아이들이 날 둘러싸고 놀려대니, 좀 골치가 아파서 그래.
하하, 그래도 악의는 없을 겁니다. 그쪽은 카시미어에서 온 기사죠?
며칠 전에도 당신네 사람들이 쉐라그에서 위세를 떨쳐서 그런가, 많은 아이들이 당신의 그 갑옷을 입고 싶어 하더라고요.
이 제식 스포츠용 갑옷 말인가? 뭐 그리 고급인 물건도 아닌데……
스포츠용 갑옷이라…… 설마 어둠의 기사 때문에 쉐라그에 오신 건가요?
오? 어둠의 기사를 알고 있나?
당연하죠. 저는 말할 것도 없고, 쉐라그 내에서 그분과 인연 없는 사람은 없을걸요?
그럼 취미가 뭔지 아나? 또는 뭘 해야 화를 낸다거나. 그 사람은 대체 관심 있는 게 뭐야?!
나는……
……사실 난 어둠의 기사 팬이거든. 그녀에 대해 뭐든지 알고 싶어서 말이야.
진정하고, 물어볼 게 있으면 저한테 뭐든 물어봐요. 전 어둠의 기사랑 꽤 친하거든요.
요즘은 그분이 좀 바빠서 그렇지, 안 그랬으면 제가 어떻게든 한번 만나게 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요.
쉐라그에서 바쁠 일이 뭐가 있다고?
이봐요, “쉐라그는 가난해서 눈밖에 없다”라고 밖에서 떠도는 헛소리를 믿지 마시라고요.
밖의 새 거리들을 봐요. 쉐라그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보니, 사람 손이 필요한 곳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거든요.
비록 아직 가난한 곳도 있지만, 쉐라간드의 백성들은 언젠가 이 산골짜기에서 기필코 일어설 겁니다.
그러면 아쉽게도 아직은 때가 아닌가 보군?
허허, 그것도 아니죠. 모든 것의 시작이야말로 제일 흥미로운 때이니까요.
그래서 그 유명한 어둠의 기사는, 요즘 쉐라그에 '작은 힘이라도 보태느라' 바쁜 건가?
음…… 사실 요즘 그분이 뭘 하고 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한동안 그분이 도시에 오는 걸 보지 못했거든요. 얘기를 나눈 지도 한참이나 됐어요.
계속 듣다 보니, 그렇게 친한 사이 같진 않은데.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
테라스에 한숨을 쉬는 이가 한 명 더 늘었다.
사실 나는 어제 어둠의 기사를 만났다. 그건 그녀와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수년 전, 내가 막 스포츠 기사가 되었을 때, 연합회에선 나더러 요즘 신인들의 첫 경기는 경기장에서 치르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은 나와 내 동료에게 도시 외곽으로 가서 최강이라 불렸으나 이제는 떠나기로 결심한 전사를 막으라고 했다.
운 좋게도, 어렸던 나는 단지 먼 발치에서만 그녀를 보았고, 그녀가 찬 돌멩이에 머리를 정통으로 맞은 뒤 기절했다.
그 후 병원에서 깨어난 나는 간호사들의 수다를 통해, 같이 간 사람 중 다수가 어둠의 기사의 대검을 정면으로 상대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차마 제대로 듣기 힘들 정도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때 난 깨달았다. 어둠의 기사는 내가 평생을 바쳐서라도……
쓰러뜨려야 할 목표라는 걸.
하루 전
……
너, 뭘 하고 싶은 거지?
훗, 아직 날 기억할 줄이야.
기억 안 나.
그것보다, 거기에 계속 있으면 일하는 데 방해가 된다만.
그러면 기억나게 해주지. 수년 전, 카시미어 외곽에서 한 젊은 기사가……
……
그래서?
우선 그 파울비스트부터 좀 내려놓지!
데겐블레허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추운 밤의 기사를 훑어보았다. 그녀의 양손에는 네댓 마리의 파울비스트가 들려 있었고, 땅에는 다른 파울비스트들이 어지럽게 돌아다니며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됐다, 용건만 간단하게 말하지.
내가 몇 년 동안 굴욕을 삼키며 버티고, 경기장에서 이름을 알려 누구나 아는 연승 기사가 된 건, 모두 너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직 오늘, 널 진정으로 이기기 위해서 말이야!
……그 휴대용 카메라를 들고서?
어둠의 기사가 패배하는 추한 모습이 찍힐까 봐 겁나나? 훗……
네 대검을 꺼내라! 네가 칼을 뽑는다면, 내 도전을 받아들인 걸로 간주하겠어!
그러자 그녀는…… 돌연 시선을 돌렸다. 추운 밤의 기사가 의아해할 새도 없이, 데겐블레허는 갑자기 허리를 숙여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그녀의 발밑으로 날아온 파울비스트 한 마리를 붙잡았다.
그냥 가라. 그딴 시시한 일로 더 이상 나를 방해하지 말고.
설마 '카시미어의 어둠의 기사'가, 싸움을 거절할 줄이야……
그 '다크아이언'은 네 몸만 다치게 한 게 아니라, 배짱까지도 부숴버린 건가?
싸움이라고? 하나같이 카메라 들고선 무슨. 그저 좋은 홍보가 될 만한 상대를 찾고 있을 뿐이잖아.
난 이미 은퇴했어. 네가 뭐라 생각하든 상관없지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방해하진 마.
아니, 이렇게 깊은 산골에 머물면서, 남의 지시를 받으며 이런 자질구레한 일이나 하는 걸 정말 원한다고?
이런 잃어버린 파울비스트들을 잡는 것쯤은, 건장한 쉐라그인 아무나 데려와도 다 할 수 있다고.
스포츠 기사…… 아니, 모든 전사는 매번 한계에 도전하는 결투 속에서 존재의 의의를 찾는 거 아니었나?
이야기는 끝난 거지?
지나갈게.
추운 밤의 기사가 쉴 새 없이 말하는 동안 이미 모든 파울비스트들을 다 잡아들인 데겐블레허는, 이 흥분한 방문객에게 곁눈질조차 주지 않은 채 그 앞을 바삐 지나갔다.
……내가 반드시 진정한 너로 돌아오게 해주겠어! 넌 결국 검을 뽑게 될 거다, 어둠의 기사!
데겐블레허 씨…… 드, 드디어 만났네요……
진정해, 또 한스가 없어진 거야?
한스?
휴…… 역시 데겐블레허 씨네요!
우선 이 파울비스트들부터 다 보내고 나서, 바로 설산에 가 찾아보지. 잠시만 기다리도록 해.
……그쪽 손자가 없어진 거야?
무…… 무슨 손자를 말하는 겁니까, 한스는 우리 역참의 버든비스트라고요.
……
이런 사소한 일에도, 어둠의 기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자신을 무시하던 그녀의 그 오만한 태도를 다시 생각하며……
추운 밤의 기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카시미어 욕설*!
갑작스러운 분노에 찬 고함에 술집 사장은 제자리에서 멍하니 굳었고, 안에 있던 다른 손님들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쪽을 쳐다봤다.
……미안, 내가 그만 추태를 부렸군.
괜찮아요. 어차피 그 '고' 어쩌고 하는 카시미어 말은 알아듣지도 못했으니까.
많은 여행객이 쉐라그에 오는 건 다 기분 전환을 위해서죠. 설산에 올라 크게 소리치면, 아무리 큰 스트레스라도 싹 사라지거든요. 그쪽도 한번 해보시는 게 어때요?
내 고민은 어둠의 기사 때문인데…… 그나저나, 그녀에 대해 더 아는 거 없어?
음, 생각해 보니…… 수년 전에 그분이 막 쉐라그에 왔을 때, 가끔 술집에 짐이 너무 많으면 예전 사장님이 그분에게 도와달라고 부탁드리곤 했죠.
그때 전 그냥 잡일이나 하는 종업원이었고, 데겐블레허 씨가 그렇게 유명한 줄도 몰랐어요. 그런데 어느 날 밤에……
어이, 네가 그 사람들이 말하는 무슨 무슨 기사냐?
전에 술집 종업원이 말하던데, 아무리 밤새워 마셔도 넌 똑바로 걸어 나갈 수 있다고 말이야.
……누가 그런 말을 한 거지?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아. 우린 승복할 수 없으니, 우릴 전부 쓰러뜨리기 전엔 여기서 못 나갈 줄 알아!
……
조건이 하나 있어. 너희 전부, 각자 집 주소를 적어서 나한테 줘.
좋아!
잠깐…… 주소는 왜?
천천히 더 들어보세요.
그 멍청이들은 마시자마자 바로 후회했죠. 한 병정도 되는 술을 데겐블레허 씨는 꿀꺽하고 두 모금에, 숨도 안 쉬고 마셔버렸거든요.
그러자 그들은 어둠의 기사와 번갈아 가며 마시겠다고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고, 그분은 한잔 또 한잔 정말로 연달아 두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마셨어요.
결국 술집 안에 한 무더기의 취객들이 죄다 고꾸라지고 나서야, 그분이 그 멍청이들을 한 명씩 둘러메고 입구에 있는 역참까지 데려다주었죠.
그제야 주소를 요구한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그날 이후로는, 감히 데겐블레허 씨를 귀찮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답니다, 하하!
……재미있는 이야기긴 한데, 그걸로는 그녀의 취향이나 성격을 알 수는 없겠는걸.
그걸 왜 몰라요? 그분이 술을 엄청 좋아하신다는 걸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게 아니라면 왜 사람들이 그분을 꺾지 못했겠어요, 다 단련되어서 그런 거라니까요!
그건……
허이고, 저 사람 허풍떠는 거 좀 봐봐. 저 사람 데겐블레허 씨랑 조금도 친하지 않다니까.
아이고…… 네가 친하면, 네가 말해 봐봐.
내가 너보단 훨씬 더 친하지!
이봐요, 내 말 들어봐요. 데겐블레허 씨가 가장 즐겨 하는 취미는……
바로 낚시예요.
데겐블레허 씨, 여기서 거의 하루 종일 계시네요.
빈 바구니로 돌아가는 게 그리 창피한 일은 아니에요. 이번이 겨우 두 번째 하시는 거잖아요.
안 돼, 아직……
이제 그만하세요, 제가 다음엔 미끼를 바꿔드릴게요. 그땐 꼭……
조용!
낚싯대가 움직였어.
데겐블레허는 마치 무기를 쥔 것처럼 침착하게 낚싯대를 쥐었다. 그리고 숨을 멈춘 채, 낚싯대를 힘껏 위로 들어 올렸다……
낚싯줄 끝의 낚싯바늘엔 아무것도 없었고, 미끼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
아, 괜찮아요,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죠.
……데겐블레허 씨?!
……호수에서 헤엄쳐 올라왔을 때, 데겐블레허 씨는 한 손에 한 마리 거대한 린수를 움켜쥐고 있었죠. 그때 이후, 모두가 그분에게 진심으로 탄복했어요.
뭐가 됐든 데겐블레허 씨는 절대 빈손으로는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니까요. 저희도 가끔은 그 분에게 사냥감을 좀 빌리기도 했죠.
물론, 나중 이야기긴 한데, 낚싯대를 다루는 솜씨도 점점 좋아지시더라고요.
아니에요!
이 꼬마 녀석은 언제 들어온 거야? 어서 나가지 못해!
제 말 좀 끝까지 들어보세요. 제가 여러 번 봤는데, 데겐블레허 언니는 낚시로 잡은 린수를 전부 다시 호수에 풀어줬어요.
데겐블레허 언니는 쉐라그의 작은 동물들을 좋아해요.
사냥을 더 좋아한다는 건가?
아니, 아니라고요!
데겐블레허 언니!
부모님은 집에 안 계셔?
네, 언니 혹시 우리 부모님을 만나러 온 거예요?
……지나가다가 3달 전에 너희 집에 비스트 약품을 가져다줬던 게 생각이 나서 말이야. 그때 그 작은 치스티비스트, 병이 아주 심각했었잖아.
지금은 좀 괜찮아졌어?
아주 좋아요…… 아, 조심……
한 마리 치스티비스트가 튀어나와 데겐블레허에게 곧장 부딪혔다…… 그리곤 머리를 흔들며 아픔에 소리를 질렀지만, 데겐블레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놀란 아이의 시선 속에서, 데겐블레허는 웅크리고 앉아 치스티비스트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그 덜렁대던 작은 녀석을 달래주었고 이내 치스티비스트는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잠깐 못 본 사이에, 벌써 이렇게나 컸구나.
좋네.
치스티비스트한테 머리로 들이받혔는데 멀쩡한 사람을 본 적 있나요?
데겐블레허 언니는 작은 치스티비스트를 꽤 오랫동안 달래주고는, 떠나면서 저한테 치스티비스트를 배불리 먹이라고 당부까지 했다니까요.
……
후후, 동물이라니, 그건 데겐블레허 씨를 너무 얕잡아본 거죠.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래, 명색이 어둠의 기사가 설마하니 그런 걸 좋아하겠냐고!
데겐블레허 씨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 있어요.
데겐블레허 씨?
왜 눈밭에 앉아 계세요?
……
오늘은 모처럼 여유가 생겨서, 조용한 곳에서 잠깐 쉬고 싶었거든.
혹시 내게 부탁할 일이 없으면……
아, 그럼요, 당연하죠.
알겠다! 설산에서 검을 수련하고 있었던 거지. 내심 다시 경기장으로 돌아가고 싶은데도, 그저 티 내고 싶지 않은 것뿐이었어.
전혀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뭔데……
확신하건대……
데겐블레허 씨는 쉐라간드에 귀의하려고 하는 거예요!
엥?
쉐라간드시여 감사합니다. 데겐블레허 씨는 틀림없는 저희 쉐라그인입니다.
잠깐, 그게 어떻게 쉐라간드로 이어지는 거지?
설산에서 사색에 잠기는 것은, 쉐라간드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지혜에 가까워지는 방법이에요.
데겐블레허 씨처럼 대단한 사람도, 매번 그런 사색 속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거죠.
젊은 기사님, 데겐블레허 씨를 이해하시려면, 쉐라그의 문화를 더 많이 배우셔야겠어요.
……
깊은 밤, 술집의 사람들은 어느새 흩어졌고, 사장은 바 테이블에서 잔을 닦았다. 창가 자리에는 추운 밤의 기사만이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었다.
결국 원하던 답은 얻지 못했나요?
……난 어둠의 기사를 이기기 위해서 10여 년을 준비해 왔어.
얼마 전 그녀가 빅토리아인들 앞에서 뛰어난 활약을 했다길래, 경기 일정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쉐라그로 오기로 결심한 거고.
하지만 막상 와 보니, 무적이라던 어둠의 기사는 이미 한적한 시골 생활을 즐기는, 실없는 사람으로 전락해 버렸더군.
빅토리아인과 맞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는 소문은, 이제 보니 전부 호사가들이 지어낸 헛소리였던 것 같아.
무슨 그런 말씀을 하는 겁니까? 제가 비록 그 현장에 있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이 다 봤다고 하니, 다시 가서 확인해 보는……
그만!
……미안하지만, 요 며칠 너희 쉐라그인들에게서 제대로 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듣지 못했어.
아마 나 같은 전사의 집념이 다른 사람들에겐 분명 괴상하게 보였을 테니, 나도 굳이 너희에게 억지로까지 이해해달라고 하진 않아.
어둠의 기사가 스스로 타락하기로 했으니, 나도 이만 떠나려고 해. 며칠 동안 신세 잘 졌어.
이해해요, 이해합니다.
근데 오늘은 눈보라가 올 모양이에요.
그러니 여기서 하룻밤만 더 묵으시는 건 어떠세요? 숙박비도 깎아드리고, 술도 한 병 드릴 테니, 쉐라그에 대한 좋은 인상만 가져가도록 해요.
평범한 눈보라 정도는 크게 상관없어. 악천후 속에서 다니는 건 이미 익숙하거든.
그쪽은 모르겠지만, 여기선 눈보라가 오면 곧이어 바로 눈사태가 뒤따라오거든요.
그래서 너희는 어떤 대처법이 있는데? 나도 좀 알려줘.
대처법이요? 하하, 데겐블레허 씨 말고는 눈사태 앞에선 누구든 다 두손 두발 들 수밖에 없어요.
최근 몇 년 사이에 카란 무역회사에서 경보 시스템을 만들었는데, 일단 위험이 감지되면 산에 못 올라가게 하고 있거든요.
하지만 데겐블레허 씨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그럴 때일수록 더 산으로 올라가서, 어느 산꼭대기에서 변화가 일어났는지 보시더라고요.
그러고 나서는 자리를 잡고, 쏟아지는 눈을 향해 몇 번 휙휙 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그것들을 모두 처리해 버리시죠.
제가 운이 좋게도 현장에서 두 번 정도 그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크으으, 진짜 카시미어 경기장에서의 그 어떤 영상 기록보다도 더 짜릿했다니까요.
네 말은, 그 사람이 검을 뽑아, 무술로 눈사태에 맞섰다는 거야?
검을 뽑았냐고요? 무슨 무기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그 진지하게 취한 자세는 무조건 진짜였어요.
……그게 다 사실이라고?
아잇, 쉐라간드께 맹세하고 틀림없다니까요!
제가 한 말에 반의반 마디라도 거짓말이 있으면, 쉐라간드께서 절 눈 속에 산채로 파묻히게 하실 거예요…… 거기에 데겐블레허 씨가 절 찾아내지 못하게까지 해도 돼요!
……
그렇다면……
혹시 이곳에 등산 장비 있나?
왜요, 또 떠나기 싫어졌어요?
추운 밤의 기사는 몸을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저 멀리 험준한 산꼭대기 위의 눈은, 먹구름과 어우러져 광활한 광경을 이루고 있었다.
생각이 바뀌었어.
쉐라그는 정말 좋은 곳이야.
눈보라가 닥쳐왔다. 쉐라그의 모든 집은 문과 창문을 단단히 고정하며, 쉐라간드의 시험을 견뎌낼 것이다.
거센 바람이 뒤덮은 설산 위, 오직 한 인영만이 그 속을 거닐고 있었다.
이건 데겐블레허에게 드물게 있는 일종의 '여가' 시간이었다. 그녀는 인적 없는 굽이진 산길을 혼자 만끽했고, 추위와 바람 소리는 그녀의 사고를 더욱 또렷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해방할 계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왔군.
발걸음이 빨라지며, 몇 개의 발자국이 앞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데겐블레허는 낮은 외딴 봉우리 아래서 멈춰 섰고, 위쪽의 눈덩이가 꿈틀거리며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후……
마침내 눈덩이가 쏟아져 내리자, 그녀는 한 걸음 내디디며 허리에 찬 트윈 소드브레이커를 뽑아, 폭포처럼 쏟아지는 눈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그러자 잘게 부서진 눈꽃이 그녀의 뒤로 흩날렸다.
하지만 쏟아지는 눈 속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섞여 위에서부터 빠르게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게 보였고, 데겐블레허는 손을 멈췄다.
뭐야?!
잠시 후, 눈더미 속에서 묵직하면서도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시미어 욕설*!
퉤퉤퉤, 퉷……
헬멧 속이 죄다 눈이군, 콜록콜록…… 이 *카시미어 욕설* 쉐라그!
또 너냐.
여기서 카시미어 욕설을 듣게 될 줄이야…… 생각도 못 했군.
추운 밤의 기사는 몸의 눈을 털며,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자신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무기를 쥐고 있는 데겐블레허가 있었다.
어둠의 기사!
난 알고 있었다. 네가 반드시 돌아올 거라는걸. 이게 바로 진짜 너니까!
데겐블레허는 물끄러미 자신의 무기를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깨달았다.
오해하지 말라고……
나, '추운 밤의 기사', 쉐라간드의 증언 아래 네 도전을 받아들이겠다!
너의 검이 날카롭기를!
……
네 그 대검은 어디 있지?
어째서 막대기 두 개를 들고 있는 거냐?
……
난 지금 네 우스갯소리를 들을 기분이 아니거든.
혹시 방금 그 눈사태, 네가 일으킨 건가?
그래, 내가 한 짓이다!
눈사태를 일으킨 외지에서 온 말썽꾼이라면야, 내가 무력을 사용할 이유가 될 수 있겠군.
그런데 아무리 눈 속으로 떨어졌다지만, 이 정도 높이라면 부상을 입기 충분했을 텐데.
이 정도 다친 걸로는, 날 막을 순 없지.
내 10여 년의 기다림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절차상의 하자 정도야 나중에 보완해서, 온 카시미어에 내가 '어둠의 기사'와의 대결에서 정정당당하게 승리했다고 알리겠어!
죽고 싶은가 보네.
추운 밤의 기사가 휴대용 카메라의 전원 버튼을 누르는 동시에, 어둠의 기사는 마치 수년 전처럼 무기를 휘두르며 뛰어올랐다.
무기가 열 차례 넘게 교차했고, 데겐블레허는 도전자를 낮은 산 아래로 몰아붙였다. 추운 밤의 기사는 이를 악물고 막다른 곳에서 몸을 날려 뛰어올랐다……
상대방의 소드브레이커는 단 한 끗 차이로 늦게 산자락을 강하게 내리쳤고, 여러 개의 돌멩이가 튀어 올랐다.
그녀는 거기에 맞춰 발을 걷어찼다. 마치 예전 카시미어 외각에서 그랬던 것처럼, 돌멩이 하나가 추운 밤의 기사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추운 밤의 기사는 가볍게 검을 휘둘러 날아오는 돌멩이를 두 조각으로 갈랐다.
추운 밤의 기사는 천천히 산자락으로 돌아왔고, 데겐블레허는 뒤로 물러서며 자세를 취했으며, 이내 두 사람은 또다시 대치하게 되었다.
역시.
나 혼자만 그날을 기억하고 있던 건 아니었나 보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카시미어 외각에서 네가 찬 돌이 내 머리를 맞췄지.
……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하하, 하지만 네 행동에서 이미 네 속마음이 드러났는 걸.
안타깝지만, 난 예전의 내가 아니야. 더 이상 네가 마음대로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아니라고.
다음 검은, 네 심장을 가져갈 거다!
넌 그럴 수 없어.
고작 눈사태 하나도 제대로 일으키지 못하고 소란만 피웠을 뿐이니까 말이야.
그리고 망상에 너무 오래 빠져 있으면, 생각만 굼떠질 뿐이야.
하하하하, 어둠의 기사씩이나 되는 자가 내게 허세만 부리다니, 정말……
그 말을 마치기도 전에, 희미하게 울리던 굉음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가 고개를 들어보니, 방금 싸움의 진동이 새로운 눈사태를 불러와, 눈 폭포가 돌덩이를 휘감은 채 무겁게 쏟아져 내렸다.
돌덩이가 금속에 부딪히는 소리는 몇 번의 신음과 함께 곧 잠잠해졌고, 두꺼운 눈더미는 또 한 번 주저앉은 추운 밤의 기사를 덮어버렸다.
콜록콜록…… 과연 세 번 연속 우승을 차지한 전설답군.
지금의 기사 스포츠 수준은, 아직도 너무나 낮았던 거였나……
어둠의 기사의 검……이 아닌, 막대기 아래서 죽을 수 있다면, 그게 내 인생의 영광이지.
……
넌 죽을 만큼의 죄를 짓진 않았어.
다만 눈사태를 고의로 일으킨 자는 쉐라그에서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해. 아마 너는 국외로 추방될 거야.
……
아니, 잠깐만.
어둠의 기사, 네 실력은 아직도 이렇게나 대단하잖아. 만약 카시미어로 돌아간다면,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챔피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넌 모르겠지만, 빛의 기사가 은퇴한 후로 기사 스포츠는 나날이 악화되고 있어. 많은 사람이 어둠의 기사의 복귀만 기다리고 있지. 연합회도 네게 추가적인 양보를 할 의향이 있다는 소문을 흘리고 있고.
전에 말했잖아, 난 이미 은퇴했어. 카시미어가 무슨 조건을 내걸건, 더 이상 내가 그곳으로 돌아갈 일은 없어.
하지만…… 굳이 카시미어가 아니더라도, 네 힘을 필요로 하는 곳은 더 많이 있을 텐데.
왜 하필 여기야? 어째서 이 아무것도 없는 설산인 거지?
내가 아무리 어리석다 해도, 오직 끊임없는 싸움만이 전사에게 생존의 가치를 줄 수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고.
설마 너는 쉐라그에서 세월을 낭비하려는 건가? 아니면 경전에 적힌 헛소리를 믿는 건 아니겠지? 콜록콜록……
……이제 그만 말하고, 체력이나 아끼시지.
오리지늄 아츠를 쓰지 못하는 라이타니엔인에게, 생존 가치가 대체 어디 있을까?
데겐블레허는 대답할 수 없었고, 하여 그녀는 낡은 장비를 가지고 카시미어에 왔다. 그때의 그녀는 '영광스러운 기사의 나라'가 답을 주리라 생각했었으니까.
패배를 거의 경험해 본 적 없던 젊은 시절의 그녀는, 거듭된 승리 속에서 미래의 경기장에 답이 있음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정상에 올라 더 이상 싸울 상대가 없어졌을 때가 됐음에도, 그녀는 그 어떤 의미 있는 대답도 얻지 못했다.
몇몇 카시미어인들은 데겐블레허에게 사치스러운 즐거움이야말로 삶의 원동력이며, 욕망이 팽창하는 속도가 항상 그녀가 욕망을 충족시키는 속도를 뛰어넘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걸 이해하는 것이, 데겐블레허에겐 경기장에서의 전투에서보다도 더 힘들었다. 그녀의 모든 시도는 결과적으로 '높은 수준의 삶' 따윈 아무런 재미도 없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확인시켜 주었을 뿐이었다.
무슨 허울 좋은 명분을 꾸며낸들, 그 역시 삶에 대한 의지에 순응하기 위해 약간의 풍파를 만들어 내는 정도였을 뿐이었다.
……아니, 내가 카시미어에서 있을 때 거둔 가장 의미 있는 수확은, 더는 어떤 이상도 믿지 않게 된 거야.
카시미어인들이 내게 건넸던 모든 것들이 실은 과대 포장된 허영심이란 걸 깨달았을 때, 나는 떠나기로 결정했지.
그리고 너희가 입에 달고 사는 '순수한 전투'는…… 내가 처음 쉐라그의 눈사태를 마주했을 때, 비로소 찾을 수 있었어.
눈사태로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이끌고 산을 벗어났을 땐, 이곳이 바로 내가 머무를 곳이라 확신했지.
만약 네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
눈앞의 스포츠 기사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투박한 '눈사람' 하나만이 그 자리에 대신 남아 있었다.
데겐블레허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눈사람의 '머리'를 흩트리자, 낯익은 금속 헬멧이 드러났다.
비록 아무런 반응도 없었지만, 헬멧 틈에서 내뿜는 따뜻한 김으로 보아, 안에 있는 사람은 아직 숨을 쉬고 있는 듯했다.
쉐라그인들은 늘 그랬듯이 호숫가에서, 눈사태가 일어난 산에서 돌아오는 데겐블레허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오늘의 그녀는 어깨 위에 한 사람을 짊어진 채였다.
데겐블레허 씨, 다행히 늦게 돌아오셨군요! 실은 친구와 내기했거든요. 오늘은 데겐블레허 씨가 평소보다 늦게 산 아래로 내려오실 거라고요.
눈사태 같은 건 되도록 조금만 건드리세요. 쉐라간드의 심기는 쉽게 예측하기 어렵답니다.
데겐블레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자신의 생명과 안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에 자연스럽게 응답하고 있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데겐블레허 씨!
한스를 되찾아주신 덕분에, 이제 그 녀석도 다시 일할 수 있게 됐어요.
……
마침 잘됐네. 이 사람을 역에다 데려다줘, 카시미어로 돌아갈 거거든.
그에게는 그가 속한 곳이 따로 있으니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