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듯한 발걸음
쉐라그의 물류 시스템을 개선하려다가 딜레마에 빠져버린 쿠리어, 그때 때마침 실버애쉬가 쿠리어의 앞에 나타난다……
파쇄기 옆, 쿠리어의 손에는 표지에 《쉐라그 물류 시스템 기획안》이라고 적힌 두꺼운 종이 뭉치가 들려있었다.
그의 표정은 무엇인가를 망설이는 듯 굳어있었다. 하지만 결국, 쿠리어는 손에 들려있던 기획안을 파쇄기에 넣으려 했다.
잠깐만요.
바이슨…… 선생님.
왜 기획안을 없애려고 하는 건가요?
……불합격한 기획안이기 때문이에요.
전 물류 수업의 강사고, 쿠리어 씨는 학생이에요. 기획안의 합격 여부는 쿠리어 씨가 결정할 일이 아니죠.
게다가 쉐라그의 물류 시스템과 관련된 기획안을 작성하겠다고 처음 저한테 말씀하셨을 때는, 지금 같은 표정이 아니었잖아요.
……
제가 좀 봐도 될까요?
……그러세요.
음, 잘 정리되어 있네요.
인력, 비용, 운송 수단, 보관 방법…… 고려해야 하는 부분들 모두 빠짐없고요.
잘 만들어진 기획안이에요.
다만 아직 해결하지 못한 한 가지…… '공백지대'에서의 공사 문제가 있네요.
……네.
쉐라그와 주변 국가 사이에 통제가 미치지 않는 '공백지대'가 존재합니다.
물류 시스템을 개선하려면 지금보다 더 나은 교통 인프라가 건설되어야 하는데, 쉐라그가 '공백지대'를 마음대로 개발하는 건 주변 국가에서 좌시하지 않을 거예요.
이 문제는 제가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이제 포기하려고요.
제가 잘못 기억한 게 아니라면, 비슷한 문제의 해결 방안을 이미 이야기한 적 있을 텐데요.
첫 번째, 국제 물류 회사에 투자한다.
하지만 이 방법을 사용한다면, 기획안을 굳이 작성할 필요가 없어요. 모든 것을 숙련된 국제 물류 회사, 예를 들면…… 마운틴대쉬 로지스틱스 같은 곳에 넘기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건 저희도 이미 이야기했었던 부분이고요.
마운틴대쉬 로지스틱스가 쉐라그에서의 사업을 보장받으려면, 신뢰할만한 관리자가 필요해요. 예를 들면, 쿠리어 씨 같은 사람이죠.
아쉽게도 쿠리어 씨가 거절하셨었지만, 지금은 그 결정에 후회하시나요?
그건…… 아니에요.
두 번째 방법은, 쉐라그를 떠나서 자신만의 물류 회사를 설립하는 것이죠.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 회사의 배후에 쉐라그가 있다는 걸 알 수 있겠지만, 표면적으로라도 쉐라그에 속해 있지 않다면, 회사에 대한 방해가 훨씬 적어질 테니까요.
저도 알죠, 하지만……
당사자인 쿠리어 씨가 이 방법대로 하고 싶어 하지 않죠.
마치 제 요청을 거절한 것처럼 말이에요.
무엇이 됐든 간에, 이 모든 방법은 쿠리어 씨가 카란 무역회사를 떠나야 한다는 걸 의미해요. 어쩌면 쉐라그마저 떠나야 할지도 모르고요.
쿠리어 씨가 정말 없애려고 하는 건, 쉐라그를 떠난다는 생각인 거죠?
……정신을 차려보니, 이 기획안은 모든 분야를 제가 관리하는 걸 전제로 설계됐더라고요.
이건 저를 위해 만들어진 맞춤형 기획안이니까요. 만약 실행해야 한다면, 전 쉐라그를 떠나야 하겠죠.
제가 너무 오만했어요.
그러면 이 기획안을 이렇게 포기할 생각인가요?
다른 기획안을 만들어서 주인님께 드리고, 그에 맞는 적임자를 찾아달라고 부탁드릴 거예요.
그러면 쿠리어 씨는 이 기회를 이렇게 포기할 건가요?
……
쉐라그가 쿠리어 씨에게 있어 큰 의미가 있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건 한편으로는 쿠리어 씨가 실력을 발휘할 기회이기도 하지 않나요?
만약 쿠리어 씨가 이 기회를 원하는 게 아니라면……
애초에 어째서 로도스 아일랜드 수업에 등록해가면서까지 자신을 발전시키려고 한 건가요?
생각해주셔서 감사하지만, 전 이미 결정했어요.
바이슨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쿠리어는 바이슨의 손에 있던 기획안을 도로 가져갔다.
쿠리어가 다시금 기획안을 파쇄기에 넣으려던 그 순간, 등 뒤에서 맑은 새소리가 울려 퍼졌다.
갑자기 나타난 파울비스트 한 마리가 쿠리어보다 더 빠른 속도로 기획안을 물고 갔다. 너무나도 익숙한 생김새…… 텐진이었다.
……주인님.
바이스, 요즘 생각이 조금 위험한 것 같구나.
전…… 죄송합니다, 주인님.
다만……
하지만 나도 궁금하더군. 그러니까 바이스, 이 기획안을 실행해 봐.
지도 제작, 경로 계획, 마을 중재, 인력 배치……
아마 계속 추진하다 보면 알게 될 거다.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꼭 그렇지도 않다는 걸 말이야.
……알겠습니다.
잠깐.
나도 너와 함께 간다.
네? 하지만……
네 수하 중에 눈사태 조기경보 소대가 있지 않나?
나를 그 소대의 일원으로 하면 되겠군.
어디 네가 스스로 생각하는 만큼 능력이 있는지도 가까이서 지켜볼 겸 말이야.
……알겠습니다.
……실버애쉬 씨, 이렇게 해도 정말 괜찮겠어요?
이렇게 해도 돼.
바이스도 이제 자기 자신을 직시해야 할 때야.
……
스읍……후우……
……주인님,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괜찮아, 다른 소대원들은?
모두 이미 산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지금 주인님의 체력으로는 이 행군을 끝까지 하는 건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바이스, 이거 일부러 나를 내쫓으려고 이러는 건가?
제가 감히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단지 주인님께선 평소 사무실에서 공무를 처리하는 경우가 많으시니, 저희같이 오랜 시간 밖에서 뛰어다니는 사람들만큼 체력이 좋지 않은 것도 당연합니다.
하.
여기서 잠시 쉬시죠.
산 정상에 있는 소대원들에게 저희를 기다려달라고 하면, 분명 이해해줄 겁니다.
……가지.
나 때문에 측량 작업이 더 지체돼서는 안 되니 말이야.
네.
……
네 말이 맞아, 확실히 오랫동안 산속으로 들어가지 않았었군.
어렸을 때는 산타기의 달인이셨었죠.
그건 어머니를 많이 닮았었지.
……지금은 닮지 않았지만 말이야.
지금도 닮으셨습니다, 단지 주인님이 자신을 숨기는 법을 배웠을 뿐이죠.
그러고 보니 지금껏 말하지 않았었군. 널 주웠던 그날, 두 여동생이 나를 사냥에 데리고 간 덕분에 널 만날 수 있었어.
사실 진작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
두 아가씨도 입이 그리 무겁지 않으신 편이니까요.
그날 우연히 두 아가씨가 주인님을 억지로 사냥에 데리고 나갔고, 우연히 아가씨들과 떨어지는 바람에, 우연히 저를 만나셨죠.
눈보라가 그렇게나 심했으니, 사실은 그때 주인님도 길을 잃으셨던 거죠?
그 후 내심 불안함을 안고서도 냉정함을 가장하며 저를 데리고 산에서 내려온 뒤, 실버애쉬 저택으로 데려가셨죠.
후에 저의 조부모님이 찾아와 어려서 부모를 잃은 저를 시종으로 받아달라고 부탁드렸을 때, 주인님께서는 같이 놀 동성 친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큰 주인님을 설득해 주셨고요.
전 그렇게 해서 실버애쉬의 일원이 되었죠.
……아마도.
두 분 모두 건강하시지?
네, 주인님 덕분에요. 할아버지는 지금 투리쿰에 있는 경로당에서 활약하고 계시고, 할머니도 조그마한 상점을 운영하면서 매일 여유롭게 지내고 계십니다.
좋군.
나에게 마터호른은 어릴 적부터 가문에 충성을 다한 호위였기 때문에 그 존재가 너무나도 당연한 거였지만, 너는 그렇지 않았어.
넌 내가 직접 거둔 사람이지……적어도 난 그때 그렇게 생각했었다.
게다가 넌 몸놀림이 매우 민첩했지. 그래서 난 한동안 너를 통해 모든 소식을 전달했고, 또 전달받았었다.
하지만 사실 그건 너라는 존재를 자랑하고 싶었을 뿐이었어.
혹시 주인님께서 그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신다면, 결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게는 그것 또한 삶의 의미를 찾아준 것이었으니까요.
어찌 됐건, 밖에서 주워온 아이 하나가 뜬금없이 가문에 들어온 셈이니, 여러 사람이 저를 탐탁지 않아 했죠.
그런 상황에서, 제가 주인님의 이름을 빌려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았을 거라고 단언하실 수 있나요?
적어도, 내가 알게 하진 않았잖아.
하하, 정말 주인님답네요.
게다가……
처음에는 산속을 뛰어다니는 게 대체 무슨 재미가 있다는 건지, 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숲과 산길을 거닐고……
설산의 꼭대기에 오르기도 하고……
산 정상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멀리 산봉우리와 푸른 하늘로 이뤄진 절경을 보았을 때……
비로소 즐거움을 느꼈어요.
이후론 점점 이런 느낌이 좋아졌습니다.
대장, 주인…… 실버애쉬 대원, 오셨군요.
상황 보고.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부터 말해봐.
이 산봉우리는 예정된 측량 작전의 마지막 지점이며, 조금 전 저희는 쉐라그와 주변 국가 사이 '공백지대'의 지형도를 그리는 걸 마쳤습니다.
'공백지대' 내 모든 마을의 위치도 확인되었습니다.
이 마을들을 경유지와 저장소로 활용하도록 설득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전문가들이 가장 효율적이고 비용을 아낄 수 있는 물류 경로를 설계했습니다.
나쁜 소식은?
나쁜 소식은…… 경로 계획이 사실상 거의 완성되었으며, 비용과 시간을 고려했을 때 대체로 수용 범위 내에 있긴 합니다만……
막상 저희가 계획안을 가지고 각 마을에 이야기해 봤을 때, 일부만 동의하고 나머진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이것 또한 예상범위 내야. 어떤 마을이 동의하지 않은 거지?
이곳을 봐주십시오.
여기 몇 마을들이며, 특히 문제가 되는 마을은 이곳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외지인을 대하는 태도가 그리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촌장과는 비교적 말이 잘 통했으나, 그런 촌장마저도 다른 사람들의 의견 때문에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음…… 이 마을은……
……
철수한다.
포기하려고?
아니요.
먼저 투리쿰에 다녀와야겠습니다.
그곳에 이 마을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열쇠가 있거든요.
바이스 씨, 그러니까 그 물류 통로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이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야 한다는 말씀이신 거네요.
그래서 제가 아버지께 편지를 써드리기를 원하시는 거고요?
당신 아버지는 마을의 현자이시니까요.
물론 원하지 않으신다면, 저도 억지로 권하지는 않겠습니다.
방금 이미 이 일의 위험과 수익 모두 알려 드렸으니까요.
당연히 해드려야죠!
만약 그때 바이스 씨의 추천이 없었더라면, 전 절대 쉐라그에 와서 이 기차역처럼 좋은 직장에 다니지 못했을 거예요.
게다가 말씀하신 대로라면 쉐라그 주변에 그런 물류 운송 루트가 만들어진다는 건데, 정말 꿈만 같은 일이잖아요!
바로 쓰겠습니다!
잠깐만요.
네?
집에 안 돌아간 지 꽤 됐을 텐데, 가족들에게 전하고 싶은 물건을 준비해두면, 제가 가는 길에 같이 가져다줄게요.
그건…… 너무 염치없는 것 같아서.
괜찮아요. 바깥 마을과 쉐라그는 워낙 연락이 잘 안 되니까, 자주 보급을 받지 못하잖아요.
게다가 이렇게 하면 당신 아버지를 설득할 확률이 올라갈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
투리쿰 역무원과 잘 아는 사이처럼 보이는군.
이곳은 쉐라그의 모든 편지와 화물들이 거쳐 가는 중간 경유지니까요.
저는 이곳의 분위기를 좋아합니다.
이것도 네가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물류 수업을 받기로 한 이유 중 하나인가?
맞습니다.
전 산속을 거니는 느낌을 좋아합니다.
소식, 편지, 화물이 그들의 주인 손에 배달되었을 때, 받은 사람의 얼굴에서 피어나는 표정을 보는 것도 좋아하죠.
그게 주인님의 표정이든, 다른 사람의 표정이든.
기쁜 표정이든, 슬프거나 괴로운 표정이든 말이죠.
아마 주인님께서 어린 시절에 무심코 한 행동이셨겠지만……
전 정말 이런 느낌을 좋아합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그런 느낌이요.
게다가……
처음에는 주인님께서 야카 형님과 저에게 카란 무역회사의 구체적인 업무를 맡기지 않으시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야 점점 주인님의 생각을 이해하게 되었죠……
주인님께서는 저희가 스스로 미래를 선택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을요.
난 여태껏 내가 너희의 주인이라고 생각한 적 없다.
그렇기에 또한 내가 너희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생각도 한 적이 없지.
하지만 주인님께서는 구태여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주인님의 생각을 말하지 않으시잖아요.
오는 길에, 저는 줄곧 생각했습니다. 주인님은 대체 무엇을 위해 오셨을까.
저를 붙잡기 위함이든 내쫓기 위함이든, 이곳에 오실만한 가치는 없을 텐데… 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말해보겠나?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닙니다.
참, 잊으셨을지도 모르겠네요……
지금 가려는 이 마을은, 저희가 십여 년 전에 갔었던 마을입니다.
그래?
다 썼습니다, 바이스 씨!
그리고, 이건 제가 가족에게 주고 싶은 물건들이에요.
죄송해요, 물건이 조금 많네요. 혹시 불편하시면……
괜찮아, 물건은 이쪽에 계신 분께 넘겨줘.
……
어라, 하지만 이 분은 엔시오데스 님……
아니, 지금은 그저 쉐라그 탐색대의 일원일 뿐이야. 그리고 난 대장이지.
……그랬었지, 잊을 뻔했군.
내가 들지.
그,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 꽤 무겁군.
그쪽은…… 누구 신가?!
에델바이스 현자님, 절 잊으신 거예요?
전 쉐라그 탐색대 대장, 바이스입니다. 여기는 저의 전사, 마터호른이고요.
아…… 그래그래, 기억이 나네.
마터호른, 자네도 현자께 인사드리도록 해.
오랜만이군, 현자.
그래, 그래.
처음 봤을 때는 어디서 온 지도 모르는 야만인인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 쉐라그의 사자였다니. 정말 생각지도 못했지.
내 바보 같은 아들 크리스는, 그놈은 쉐라그에서 잘 지내고 있나?
현자,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크리스의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건…… 크리스가 가족을 위해 준비한 선물들이지.
이, 이건…… 그 녀석, 뭘 또 이렇게 많이 준비한 거야?
(작은 목소리로) 후우……
(작은 목소리로) 주인님, 고생하셨습니다.
(작은 목소리로) 괜찮다.
크리스는 쉐라그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곧 주임으로 승진할 거예요.
편지를 읽어보시죠. 편지에는 저희가 이번에 온 이유도 담겨 있습니다.
……
당신들의 뜻은 내 알겠네.
일단 집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이왕이면 마을 사람들 설득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네, 아무래도 마을 사람들과 상의해야 할 것 같군.
하지만 안심하게. 크리스의 편지에 그대들의 보증까지 있으니, 분명 마을 사람들도 동의할 걸세.
만약 저희가 나서야 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알겠네.
주인님, 지금은 기억나셨어요?
오는 길에 그렇게 오랫동안이나 짐을 들었는데, 어떻게 기억이 안 나겠어?
부디 주인님께서 물류 루트의 중요성을 몸소 느끼셨으면 해서였어요.
게다가 분명 저도 절반은 나눠서 들어 드리지 않았나요?
그날은 수업을 마친 뒤 갑자기 바깥을 보고 싶어졌었어.
그래서 너를 데리고 몰래 산 아래로 가는 운송 차량에 뛰어올랐었지.
그날은 저를 정말 많이 놀라게 하셨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마터호른을 데려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마터호른은 분명 반대할 테고, 도리어 날 붙잡을 수도 있기에 너를 찾았었어.
저는 왜 주인님을 막지 않았을 거 같으셨어요?
예전의 너는 다른 사람이 어떤 어리석은 일을 해도 막지 않았었으니까, 설령 그게 나일지라도 말이야.
게다가 너도 계속 나가고 싶어하지 않았었나?
하지만 막상 저희가 산 아래로 내려갔을 때 바깥에 황야만 있는 걸 보고선, 전 주인님께 저희가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비록 주인님은 전혀 귀담아듣지 않으셨지만요.
돌아가 봤자 어머님께 혼이 날 테니, 차라리 더 앞으로 가보자는 거였지. 혹시 흥미로운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
제가 나올 때 주방에 있던 식량을 훔치지 않았더라면, 저희는 반나절도 못 가서 배고파 죽었을 거예요.
그때는 속으로 주인님을 많이 원망했습니다.
나한테 계속 목숨을 구해줘서 감사하다고 말하지 않았었나?
그렇지만 황야에서 굶어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하긴, 나도 그러고 싶진 않아.
그래서 식량을 다 먹었을 때는 나도 후회했지.
그때 다행히 이 마을을 발견했고, 당시엔 흰머리가 아직 없었던 에델바이스 씨가 입구에서 눈을 쓸고 계셨죠.
기억나세요? 저희 하마터면 에델바이스 씨한테 야만인으로 몰려서 쫓겨날 뻔했었잖아요.
기억나지.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네가 다급하게 탐색대의 이름을 지어내고 널 대장으로 소개했었어.
그랬더니 정말 믿어주더군. 우리를 집으로 초대해서 따뜻한 치스티밀크도 주고.
그때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떠올린 거지?
그땐 큰 주인님께서 제게 누군가가 실버애쉬 가문을 계속 지켜보고 있다고 말씀해 주셔서, 함부로 가문의 이름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리더는 눈에 쉽게 띄기 때문에, 주인님을 보호하고자 먼저 나서서 저를 대장으로 소개했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이 아이디어가 엄청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정말 유치하네요.
괜찮다, 나도 그땐 네 아이디어가 좋다고 생각했었거든.
그렇지 않았다면, 네 휘하에서 제일 용감한 전사라고 자칭하지 않았겠지.
……
왠지 모르게, 쿠리어는 잠시 침묵했다.
쿠리어는 고개를 돌려 한쪽을 바라보았는데, 그곳은 쉐라그가 있는 방향이었다.
돌아간 후, 저희는 큰 사모님께 벌을 받아 저택에 들어가서 식사하는 것을 금지당했었죠.
그게 아마도 살면서 어머니가 나에게 하셨던 가장 심한 처벌이었을 거야.
아직도 어머니께서 울면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이 나는군……
“추운 곳에서 뛰어다니는 게 그리 좋으면, 이제부터 너희 둘은 밖에 서서 식사하도록 해!”
맞아요.
그랬더니 첫째 날은 엔야 아가씨께서, 둘째 날은 엔시아 아가씨께서 차례로 저희에게 식사를 가져다주셨죠.
셋째 날은 큰 주인님께서 아예 저희와 함께 밖에 서서 식사하셨고요.
결국, 큰 사모님은 저희를 집안으로 들여보내 주셨어요.
어머니는 줄곧 너를 자식으로 여기셨고, 나 또한 너를 형제로 생각한다.
알고 있습니다.
저도 확실히 주인님께서 왜 오셨는지 알겠어요.
왜지?
저와 실버애쉬의 인연을 잊지 않으실 거란 걸, 저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그리고 제 마음속의 답을 직접 듣기 위해서이기도 하고요.
그럼, 너의 답은 무엇이지?
저의 답은……
그 기획안은 결코 제 오만이 아닙니다.
그건 오직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인님, 부디 제가 쉐라그를 떠나는 것을 허락해주시길 요청드립니다.
바로 앞에 회사 등기소가 있었다.
쿠리어는 손에 각종 자료를 움켜쥔 채 침을 삼켰다.
넌 지금, 캐스터 가문의 문을 두드릴까 망설이던 그때의 나와 같다.
주인님께서도 그때 두려우셨나요?
두려웠냐고? 아니, 난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문 뒤에 어떤 즐거움이 날 기다리고 있을지라는 기대 말이야.
……
전 그간 대담한 일도 많이 해왔고, 주인님을 위해 힘쓸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단연코 쉐라그를 떠나는 것만큼은, 영원토록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왜지?
그게 충성심에서 나온 행동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죠.
사람들은 내게 바이스와 마터호른 같은 충신이 있는 것이 큰 복이라고 말하더군.
그 사람들은 내가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수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모른다. 내가 너희를 선택한 것은 너희가 나에게 충성했기 때문만이 아니야.
넌 단지 항상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뿐이고, 난 다행히 아직 잘못된 길을 가지 않았던 거지. 그렇지 않나, 바이스?
……정말 그럴 지도요.
내가 아는 바이스는, 마냥 온화하고 착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다.
바이스는 모든 것을 지켜보고, 모든 것을 마음속에 담아두지. 다른 사람들은 네가 아무 생각이 없다고 하지만, 그건 네가 마음속에 이미 정답을 품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어서 하는 소리야.
주인님께선 제 답을 알고 계시나요?
난 그저 이번에도 여전히 우리의 생각이 비슷하다는 걸 알고 있을 뿐이다.
이번 일에만큼은 제가 유일한 적임자라는걸, 주인님과 저 모두 알고 있고요.
단지 저 스스로 과연 이 한 발자국을 내딛어야 할지 말지 확신 못했던 것뿐입니다.
주인님께서 굳이 이렇게 많은 시간을 들여서 저와 함께 여기까지 와주신 것은, 그저 저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였겠죠……
알고 계신다, 기억하고도 계신다고요.
저를 배웅하러 오신 거였군요, 맞죠?
나는 설산에서 가장 씩씩한 이트라가 언젠가 마침내 용기를 내어 설산을 내려가 더 넓은 세상으로 향하게 될 날을 기다려왔다.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를 잃으시게 될 텐데요.
하지만 대신 새로운 친구를 얻게 되겠지. 흥미로운 맹우이자 경쟁할 가치가 있는 라이벌도 말이야.
……
주인님, 이번이 아마 제가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마지막 날일 것 같습니다. 저는 주인님의 곁을 떠나고, 실버애쉬 가문을 떠나려 합니다.
저는 새로운 물류 회사를 설립할 것입니다.
이 회사는 쉐라그에 등록하지 않겠습니다. 마운틴대쉬 로지스틱스와 협력하여, 쉐라그 주변 '공백지대'의 물류 루트를 개발할 것입니다.
미래에, 이 회사는 물류뿐만 아니라 '공백지대'의 마을 건설 및 발전에도 참여하여, 쉐라그 외곽 교통을 개선할 것입니다.
어쩌면 머지않은 미래에, 쉐라그 외곽에 이동도시를 건설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그곳은 카란 무역회사의 친구인 건가? 아니면 적인 건가?
적어도 쉐라그의 친구일 것이라는 점은 보장 드릴 수 있습니다. 시장에는 영원한 아군도, 영원한 적도 없다고 주인님께서 말씀해 주셨죠.
바이슨이 너에게 협력하도록 설득할 수 있겠어?
협력할 가치가 있는 파트너와 충성심을 파악할 수 없는 부하. 바이슨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알고 있을 겁니다.
쉐라그 밖에서는 내 이름을 쓰기 쉽지 않을 거다.
주인님 곁에서 오랫동안 배웠습니다. 또한, 로도스 아일랜드에서도 많은 것을 배웠으니 당분간은 괜찮을 겁니다.
……
……엔시아가 또 사람을 내쫓았다고 날 원망하겠군.
다 자업자득이세요. 물론, 여전히 저의 집은 실버애쉬 저택입니다. 가끔 집에 돌아간다 해서 누군가 뭐라 하진 않겠죠.
그럼, 이 회사는 장차 쉐라그의 새로운 친구가 되겠군. 이름이 어떻게 되지?
그냥…… '쿠리어 로지스틱스'라고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