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실버애쉬의 그림자

실버애쉬의 그림자

오퍼레이터 레코드브릿지

카란 무역회사 설립 초기, 가문의 장로들은 엔시오데스의 행보에 의문을 품는다. 그들은 바이스가 자신들을 대신하여 무언가를 해 주길 원하지만, 이것이 바이스가 오랫동안 기다려 온 순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등장 오퍼레이터: 데겐블레허, 실버애쉬, 쿠리어


순백의 설원 위로 쏟아진 햇빛이, 설원에 쌓인 눈 위에서 반사되며 눈부신 빛을 내뿜었다.

바람이 산 사이로 울부짖는 소리를 내는 가운데, 성산에서 전해져 오는 종소리와 경 읽는 소리가 뒤섞이며 마치 오래된 이야기를 전달해 주는 것 같았다.

이곳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이 장소가 처음 생겨났을 때의 모습 그대로 오랜 세월 변하지 않은 듯했다.

바이스

흠?

바이스

흠……

바이스

발자국의 깊이를 보니, 이 일대에서 눈이 예상보다 더 많이 내린 모양이군.

바이스

얼마 전에도 이쪽 지역에 눈이 내린 적이 있었지. 이 산은 가뜩이나 원래부터 경사가 가파른 곳인데, 이대로 계속 눈이 더 쌓인다면……

바이스

내 기억이 맞다면, 주인님께서 불러오신 전문가분께서 며칠 내로 폭설이 내릴 가능성이 있다고 하셨었지.

바이스

그렇다면……

민첩한 쉐라그 전사

대장, 무슨 일이에요?

바이스

너, 팀을 데려와서 이곳에 쌓인 눈의 깊이를 측정해 줘. 그다음 전문가분을 모셔와서 이 산의 경사도를 한번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바이스

혹시라도 여기서 눈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을 좀 알아봐야 할 것 같거든.

민첩한 쉐라그 전사

알겠습니다.

바이스

그리고…… 소식을 전하고 나면 내가 주인님께 직접 보고를 올리도록 하지.


눈앞의 풍경을 보던 바이스는 무심코 미간을 찡그렸다.

첨단 기술로 만들어진 갑옷을 입고, 손에는 예리한 군용 검을 든 전사들이 의욕을 잃은 채 무질서한 모습으로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바닥에 쓰러져 신음을 내고 있었으며, 아직 여력이 남은 소수의 전사들이 분한 듯 이 상황의 '원흉'…… 금발의 키 큰 여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성 곁에 있는 노인을 본 그는 살며시 눈썹을 치켜올렸다.

연로한 귀족

그러니까, 저희 체면을 봐주지 않으시겠다는 겁니까?

데겐블레허

난 이 녀석들을 데리고 훈련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데겐블레허

그러니 네 연회에 초대할 필요는 전혀 없다.

연로한 귀족

전 그저 데겐블레허 씨께서 저희 실버애쉬 가문의 전사들을 위해 밤낮없이 고생하고 계시니, 미약하게나마 힘이 되어 드리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데겐블레허

그렇다면 더더욱 필요 없다.

데겐블레허

난 딱히 실버애쉬 가문을 위해 이 녀석들을 훈련시키고 있는 게 아니니까.

데겐블레허

저들도 널 위해 봉사하지 않을 예정이고.

연로한 귀족

그, 그건……

바이스

……

바이스

데겐블레허 씨.

바이스

주인님께서 이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데겐블레허

무슨 소식이지?

바이스

주인님께서 손님을 만나시는 자리에 데겐블레허 씨의 동행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데겐블레허

엔시오데스는 지금 어디에 있지?

바이스

주인님께선 저택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데겐블레허

오늘은 여기까지다. 해산.

바이스

……

연로한 귀족

……

연로한 귀족

……하아.

연로한 귀족

엔시오데스 님 주변에 저 고집불통 아가씨가 있다는 말은 진작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만, 오늘 아주 제대로 경험했구나.

바이스

직접 오셔도 소용없었을 텐데요, 에드윈 아저씨.

연로한 귀족

상관없다. 난 헛걸음인 걸 알더라도 직접 부딪혀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말이다.

바이스

……

연로한 귀족

마침 잘 됐어,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도 했으니… 바이스, 잠깐 얘기 좀 하자꾸나.

바이스

……좋아요.


바이스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에드윈 아저씨?

연로한 귀족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바이스, 넌 데겐블레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바이스

그녀는 강하니, 곁에 있으면 분명 주인님께서도 좀 더 안전하시겠죠.

연로한 귀족

바이스. 넌 똑똑한 아이이니,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이 그런 게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바이스

제 생각을 듣고 싶은 건가요?

연로한 귀족

엔시오데스 님께서 그녀를 데리고 온 이후로, 원래 네 것이었던 자리를 그녀에게 빼앗기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넌 정말 이 일에 대해서 아무런 불만도 없는 거냐?

바이스

제 생각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요. 주인님의 사업이 더 발전할 수 있다면 전 그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바이스

에드윈 아저씨는요? 말씀하시는 걸 보니 데겐블레허 씨를 그리 탐탁지 않아 하시는 것 같네요.

연로한 귀족

소문에는 어떤 지역의 3회 연속 챔피언이라던데, 오늘 직접 눈으로 보니 듣던 대로 대단한 전사긴 하더구나.

연로한 귀족

하지만 그 한 사람을 고용하겠다고 너무 큰돈을 쏟아부었어. 게다가 그런 요직까지 내어 주면서 말이다.

연로한 귀족

이건 조금 무례한 소리일 수도 있겠다만, 도련님께서 너무 깊게 빠지신 것 같구나.

바이스

에드윈 아저씨, 발언에 주의하시죠.

연로한 귀족

너도 참, 아직도 그렇게 도련님을 감싸고 돌다니.

연로한 귀족

나도 엔시오데스 님께서 성장하시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봐온 사람이다. 원래라면 도련님도 너처럼 나를 에드윈 아저씨라고 불러야 했겠지.

연로한 귀족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겠느냐? 다들 입 밖으로 말을 못 꺼낼 뿐이다.

바이스

주인님께서 빅토리아의 사교계에 들어가기 위해 그리했다는 걸 아저씨가 모르실 리는 없을 텐데요.

연로한 귀족

그런 거라면 그냥 그 여자를 그대로 빅토리아에 남겼으면 될 일 아니냐?

연로한 귀족

엔시오데스 님께서 쉐라그에 너 같은 호위가 있다는 사실을 잊으시기라도 한 거냐?

연로한 귀족

그 여자를 데리고 와 버리면 네 입장은 뭐가 되는데?

바이스

……

바이스

제 입장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요.

연로한 귀족

넌 정말 겸손한 아이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연로한 귀족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떨 것 같으냐?

연로한 귀족

엔시오데스 님께서 몇 년 동안 공부를 위해 바깥에 나가 계시는 동안, 페일로쉬 가문과 브라운테일 가문이 우리의 턱밑까지 쫓아왔다.

연로한 귀족

그간 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쪽으로 넘어간 줄 아느냐?

연로한 귀족

또 그간 실버애쉬 가문의 영지를 지킨 게 누구 덕분이더냐?

연로한 귀족

체스터 님, 마터호른, 너, 그리고 우리 같은 늙은이들 덕분인 것이야.

연로한 귀족

너는 그리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다만, 얼마나 많은 이들이 지금 이 상황을 질투하고 불만스러워 하는지 알고 있느냐?

연로한 귀족

데겐블레허만을 말하는 게 아니야, 살면서 그렇게 자존심 강한 젊은이들은 수도 없이 봐 왔다.

연로한 귀족

이런 젊은이가 한두 명 정도 있다면 아무런 문제 될 게 없지.

연로한 귀족

하지만, 난 엔시오데스 님께서 빅토리아에서 데려온 그 젊은이들이 우리 같은 늙은이들을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무섭다.

바이스

주인님께선 그간 한 번도 어느 한 쪽을 편애한 적 없으세요.

연로한 귀족

물론이지, 엔시오데스 님께선 한 번도 우릴 소홀히 하신 적이 없었어.

연로한 귀족

하지만 그걸로 만족하느냐? 왜 그 어린 것들과 우리가 맞먹어야 하는 게야? 그 녀석들이 뭐라고 우리 위에 올라서냐 이 말이다.

연로한 귀족

우리가 그동안 실버애쉬 가문을 위해서 해 준 게 얼만데, 이제 와서 그 녀석들한테 길을 비켜 줘야 한다고?

바이스

어쩌면 주인님께선 그들에게 그에 걸맞은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신 걸지도요.

연로한 귀족

가치? 하, 마치 내 둘째 아들이 기술 좀 배웠다고 쉐라그의 미래가 자기 손에 달린 양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냐?

연로한 귀족

엔시오데스 님은 이런 천방지축 날뛰는 녀석들이 정말로 쉐라그의 미래를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고 믿으신단 말이냐?

바이스

에드윈 아저씨는 왜 제가 아저씨 편에 설 거라고 확신하시는 거예요?

연로한 귀족

엔시오데스 님께서 공부를 하러 타국에 계시는 동안, 난 너와 마터호른이 이 가문을 위해 진심을 다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다.

연로한 귀족

내 주변에 있는 친구들은 그렇다 치고, 너희 두 젊은이를 위해서라도 이 말은 꼭 하고 싶었다.

연로한 귀족

그리고, 설령 네가 돌아가서 이 대화를 엔시오데스 님께 고해바친다 한들 그게 뭐 어떻단 말이냐?

연로한 귀족

지금 당장 눈앞에 엔시오데스 님이 계신다 해도, 내 할 말은 해야겠다.

연로한 귀족

뭐, 젊은이들은 보통 충고를 해줘도 그리 귀담아듣지 않는 경향이 있다만.

바이스

데겐블레허 씨를 빌미로 삼겠다는 건가요?

연로한 귀족

엔시오데스 님도 그렇고, 그 옆에 있는 젊은이들도 그렇고, 외부에서 온 이들이 쉐라그의 주인 자리를 차지할 시기는 아직 멀었다는 걸 깨닫게 할 필요가 있단다.

연로한 귀족

그리고 파울비스트 떼를 제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선두에 있는 녀석을 죽여버리는 것이지.

바이스

잠시만요.

민첩한 쉐라그 전사

대장,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바이스

전문가분의 의견은?

민첩한 쉐라그 전사

여기 계신 분은……

바이스

주인님께서도 신뢰하시는 분이다, 바로 말해도 괜찮아.

민첩한 쉐라그 전사

네. 전문가분께서도 대장의 판단이 맞다고 하셨습니다. 저쪽의 산은 이미 상당히 위험한 상태라고 합니다.

민첩한 쉐라그 전사

만약 나중에 눈이 더 내린다면 산사태가 일어날 확률은 더더욱 높아지겠죠.

바이스

……내 예상이 틀리길 바랐건만.

민첩한 쉐라그 전사

그래도 지금 단계에서 발견한 게 천만다행입니다. 대장의 경험이 아니었다면 대응할 시기를 놓쳤을 겁니다.

바이스

그랬을 수도 있겠지.

민첩한 쉐라그 전사

이 사실을 엔시오데스 님께 보고할까요?

바이스

……이번 일은 내가 직접 보고한다. 너흰 일단 상황을 계속 지켜보고 있어.

민첩한 쉐라그 전사

네.

바이스

……

연로한 귀족

보아하니 뭔가 생각난 모양이구나, 바이스?

바이스

아저씨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깨달았어요.

바이스

아저씨께서 이리도 실버애쉬 가문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시다니, 정말 감동입니다.

연로한 귀족

너라면 내 마음을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요 녀석.

바이스

이렇게 하죠. 제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바이스

아저씨도 방금 들으셨듯이, 가까운 시일 내에 눈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요.

바이스

제가 눈사태 가능성이 높은 구역에서 데겐블레허 씨와 병사들이 훈련을 하도록 주인님께 말씀 드릴게요……

바이스

그리고 눈사태가 벌어지면 저희 쪽이 구조를 가도록 요청하는 거죠.

바이스

그렇게 되면 눈사태 중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를 거예요.

연로한 귀족

……끌끌, 훌륭하구나.

연로한 귀족

너와 네 부하가 한 말을 앞서 듣지 않았더라면,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다고 오해했겠어.

연로한 귀족

아니, 아니지.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느냐?

연로한 귀족

그렇군, 그런 거였어. 남들은 몰라도 나는 알지. 네가 자존심이 강한 아이라는 걸.

연로한 귀족

자기 자리를 눈앞에서 빼앗겼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바이스

……

바이스

네, 저도 아저씨처럼 실버애쉬 가문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을 계속 기다려 왔어요.

바이스는 일부러 '실버애쉬'를 강조하여 말했지만, 노인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바이스

주인님, 오늘 소식을 전하던 도중, 문투스 봉우리 일대에 눈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을 확인했습니다.

엔시오데스

일어날 확률이 구체적으로 얼마나 되지?

바이스

제가 최근에 배운 기상학 및 지리 지식에 의하면 90% 정도로 예상합니다.

바이스

이건 저희 팀의 전문가가 분석해 낸 결과입니다.

엔시오데스

이건 기회로군.

바이스

알고 있습니다.

엔시오데스

그렇다면 전권을 네게 맡기마.

바이스

알겠습니다, 주인님.

엔시오데스

이제 날 주인님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고 했을텐데.

바이스

습관이라는 게 고치기 그리 쉽지 않더군요.

바이스

참, 데겐블레허 씨를 잠깐 빌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엔시오데스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엔시오데스

물론, 그녀를 설득하는 건 너의 몫이다.

바이스

하하,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바이스

아, 그리고 오늘 에드윈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엔시오데스

흠? 요즘 에드윈이 꽤나 기운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자가 무슨 말을 했지?

바이스

상태가 꽤나 좋아 보였습니다. 주인님께 안부를 전해 달라고까지 하더군요.

엔시오데스

그거 다행이군.

며칠 후


연로한 귀족

대체 무슨 일로 이 늙은이를 이리 먼 곳까지 부른 게냐, 바이스?

바이스

아저씨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요.

연로한 귀족

무슨 일이냐? 데겐블레허의 일이라면 네가 알아서 다 준비하기로 하지 않았느냐?

바이스

물론이죠, 그 점은 걱정하지 마세요.

연로한 귀족

그럼 됐다.

연로한 귀족

참, 이 마을은 왜 오는 길에 주민이 한 명도 안 보이는 게냐?

바이스

아, 그거야 당연하죠.

바이스

제 부하들이 집집마다 마을 주민분들을 설득해서 피난 시켰거든요.

바이스

지금 마을에 남아 있는 사람은 전부 보수파 쪽 분들이에요.

연로한 귀족

보수파? 피난?

바이스

하아, 아저씨께서 소식이 조금만 빠르셨으면 제가 더 고생할 뻔했지 뭐에요.

바이스

결국 이렇게 직접 오실 것을, 괜히 준비를 더 한 느낌이네요.

연로한 귀족

너어…… 네가 날 속여?

바이스

속이다뇨, 그건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바이스

전에 이 일대에 눈사태가 벌어질 거라는 얘기 들으셨죠?

바이스

여기 있는 이 마을이 바로 곧 눈사태에 덮쳐질 마을입니다.

연로한 귀족

뭐라고?!

연로한 귀족

너 미친게냐, 바이스!

연로한 귀족

네가 그 일을 엔시오데스 님께 전할 것은 예상했지만, 이런 짓을 할 거라고는 예상 못 했다!

바이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연로한 귀족

날 여기로 부른 건 바로 너 아니냐! 도망가지도 못하게 하고, 무슨 속셈인지 내 입으로 말해야겠느냐?!

바이스

……

바이스

아저씨께선 제가 아저씨를 '쉐라간드의 뒤척임'에 부른 이유가 입을 막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연로한 귀족

그럼 아니라는 거냐?! 독한 녀석!

바이스

그러네요, 과거의 쉐라그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렇게 생각하겠죠.

바이스

하지만……

바이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에드윈 아저씨.

바이스

단순히 아저씨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굳이 이렇게 수고스러운 짓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겁니다.

연로한 귀족

너……

바이스

철거 작업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민첩한 쉐라그 전사

보고드립니다. 산 인근에 위치한 건축물들은 전부 철거했으며, 현재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거대한 공터를 확보했습니다.

민첩한 쉐라그 전사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이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 주민들로부터 항의가 있었습니다.

바이스

대피 상황은?

민첩한 쉐라그 전사

대부분 주민들은 저희의 안내에 따라 대피했으나, 일부 강경한 주민들이 저희의 말을 아예 신뢰하지 않고 있습니다.

바이스

나에게 맡겨라.

민첩한 쉐라그 전사

대장, 어디 가시는 겁니까?

바이스

데겐블레허 씨에게 부탁하려고.

노쇠한 귀족은 바이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신경 쓰기보단, 그저 어서 빨리 이 방을 벗어나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바이스의 두 손이 그의 두 어깨를 짓누르듯 강하게 붙잡고는, 이어서 노인의 비대한 체구를 전사 곁으로 밀었다.

바이스

난 잠깐 자리를 비울 테니까, 에드윈 아저씨를 잘 '보살펴' 주도록.

민첩한 쉐라그 전사

알겠습니다.

바이스

안심하세요, 에드윈 아저씨. 죽진 않을 거예요. 적어도 오늘은 말이죠.


바이스

데겐블레허 씨,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데겐블레허

헐떡이면서 오는 걸 보니 평범한 일은 아닌 듯하군.

바이스

저희가 예측한 대로 인근의 문투스 봉우리에서 큰 눈사태가 일어날 것 같아서 말이죠. 데겐블레허 씨의 도움이 필요해요.

데겐블레허

정말로 내 도움이 필요한 게 맞나?

바이스

물론입니다……

바이스

방어 수단은 제 소대가 이미 준비해 뒀습니다. 하지만 일부 주민들이 마을을 떠나지 않고 강경하게 버티고 있어서, 데겐블레허 씨와 부하분들께서 주민 분들을 지켜 주시면 좋겠어요.

데겐블레허

내 기억이 맞다면 엔시오데스가 네게 충분한 권한을 줬을 텐데.

데겐블레허

게다가 네 명석한 두뇌를 생각하면, 이런 큰 허점을 남기고 굳이 날 지원군으로 사용할 리가 없어 보이는군.

바이스

저희도 인력이 부족하니까요.

데겐블레허

……훗, 정말 별일이 다 있군. 어째서 네가 날 위해 이런 고생을 하는 거지?

바이스

어릴 땐 저도 가끔 야카 형님이랑 싸웠어요.

바이스

어떨 땐 정말로 토라져서 산속으로 숨어들기도 했었죠. 하지만 매번 배가 고파지는 바람에, 결국에는 항상 풀이 죽은 채로 집에 돌아와 형님이 만든 밥을 먹었어요.

바이스

그때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습니다……

바이스

바깥의 세상은 넓죠, 하지만 쉐라그는 그렇지 않아요. 낮에 무슨 일을 하든, 밤이 되면 좋든 싫든 우린 결국 한 식탁 위에서 같이 밥을 먹어야 해요.

바이스

그때, 서로 앙금이 남아있다면 너무 어색해지잖아요.

데겐블레허

너희도 들었겠지.

데겐블레허

대열을 정비해라. 지금부터 구조 작업에 돌입한다.

전사들

네!

데겐블레허

정말이지 훌륭한 주종 관계로군. 넌 이런 쪽으로도 그 엔시오데스와 정말 똑같아.

바이스

아하하, 그 말씀은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데겐블레허

나야말로 그 사실을 일깨워 줘서 고맙다.

데겐블레허

눈사태인가……

데겐블레허

말 나온 김에 하는 말이다만, 결국 앞으로도 계속 한 식탁에서 밥을 먹어야 하는 사이인데, 날 부르는 호칭이 너무 딱딱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데겐블레허

다른 걸로 바꿔보는 건 어때.

바이스

윽.

바이스

으음.

바이스

그렇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바이스

데겐블레허 누님.

데겐블레허는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그 말에 반박하지도 않았다.

바이스

하하.

바이스

그럼 이제…… 다른 문제를 해결하러 가 볼까요.


바이스

나 왔어.

민첩한 쉐라그 전사

데겐블레허 씨께선 뭐라고 하셨습니까?

바이스

우릴 도와주겠대.

민첩한 쉐라그 전사

다행이네요, 데겐블레허 씨가 직접 나서 주신다면 분명 마을 주민분들도 데겐블레허 씨를 다시 볼 거예요.

바이스

그녀도 그런 걸 바라지 않았던 건 아니야. 단지…… 계기가 필요했을 뿐이지.

바이스

에드윈 아저씨는?

민첩한 쉐라그 전사

에드윈 님께선 이제 진정하신 듯합니다. 제게 따뜻한 차 한 잔 내어달라고 하시더군요.

바이스

역시 에드윈 아저씨.

연로한 귀족

예전에 설령 눈앞에 엔시오데스 님이 계신다고 해도 내 할 말은 할 거라고 얘기했지.

연로한 귀족

다만 네가 평소 보여 주는 얼굴에 속아 포섭할 수 있을 거라고 오해했어. 패배를 인정하마. 이제 날 삶든 굽든 마음대로 해.

바이스

전 아저씨가 이런 사람인 줄 알고 판을 짠 거예요.

바이스

안 그랬으면 아저씬 진작에 설산에서 돌아가셨겠죠.

연로한 귀족

……흥, 이젠 오히려 네가 뭘 할지 궁금해졌다.

연로한 귀족

넌 처음부터 데겐블레허에게 무대를 만들어 줄 생각이었나?

바이스

아뇨,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것뿐이에요.

연로한 귀족

왜 굳이 그녀를 위해 이런 고생을 한 거지?

바이스

아저씨께선 자신만의 기준으로 제가 데겐블레허 누님을 싫어한다고 판단하셨죠.

바이스

만약 10년 전의 저였다면 분명 아저씨와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지금의 전 그런 감정은 진작에 버렸어요.

바이스

제가 주인님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방식은 여러 가지예요. 전 단순히 호위라는 방식만을 택하고 싶진 않아요.

바이스

오히려 제가 아저씨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주인님께선 제게 정말 크게 실망하셨을 거예요.

연로한 귀족

이상하군. 데겐블레허를 싫어하지 않는 건 그렇다 치고, 왜 그녀를 돕기까지 하는 거지? 설마 그녀에게 빚이라도 진 건 아닐 테고.

바이스

……처음엔 그저 데겐블레허 누님을 데려온 주인님을 믿었던 것뿐이에요. 그녀는 확실히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이었으니까요.

바이스

하지만 그녀의 냉담함이 적의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단순히 무관심이나 심지어는 일종의 막연함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깨닫게 되면……

바이스

아저씨도 그걸 깨닫는다면 누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거예요.

바이스

가끔 산에서 방목하는 아저씨들에게 붙잡혀 그들의 일상 이야기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참고 듣는 누님의 모습을, 아저씨는 분명 본 적이 없으실 거예요.

바이스

만약 그 모습을 보셨다면 아저씨도 분명 저처럼 그녀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받고, 또 환영받길 바라게 되었을 테니까요.

바이스

만약 쉐라그가 그녀를 받아들인다면, 쉐라그에게도, 누님 자신에게도, 심지어는 주인님께도 정말 좋은 일이 되겠죠.

바이스

누님이 제게 빚을 졌든 안 졌든, 그게 뭐 중요한가요?

연로한 귀족

……엔시오데스 님도 네가 이런 짓을 벌인 걸 알고 계시냐?

바이스

주인님께도 자신의 계획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과격한 수단을 사용해야만 할 때가 있죠.

바이스

많은 반대가 있을 거라는 사실은 주인님께서도 진작에 예상하고 계셨어요. 하지만 아무리 주인님이라도 일일이 대응하시기엔 무리가 있죠.

바이스

전 단지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주인님의 고생을 덜어드릴 뿐입니다.

바이스

게다가 주인님께서 이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 아닌지는…… 사실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바이스

에드윈 아저씨, 절 따라오세요.

바이스

아저씨도 금방 깨닫게 되실 거예요. 아주 오래전부터 주인님 눈 속에 비친 것은 실버애쉬 가문 하나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노인은 더 이상 눈사태가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는 어렴풋이 지금 그의 눈앞에 나타난 이 광활한 평야가 과거 주민들의 집이 위치했던 자리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현재 그곳은 완전한 평지였다.

그리고 그 평야 위에 열 몇 대의 트럭이 서 있었다. 이윽고 트럭이 싣고 있던 중장비에 달린 기계 팔들이 끊임없이 변형되고, 조립되고, 연결되더니……

결국에는 강철의 장벽이 되었다.

연로한 귀족

이건 대체……

바이스

소개드리죠, 에드윈 아저씨.

바이스

예전에도 말했지만, 전 주인님께 편지를 전하고, 일 년 내내 쉐라그의 산을 뛰어다닌 만큼 쉐라그의 산과 눈에 대해 상당히 익숙한 편이에요.

바이스

그리고 주인님께선 쉐라그에 돌아오시면서 저에게 눈사태 조기경보 소대의 조직을 맡겨 주셨죠.

바이스

이 소대에는 주인님을 따라 쉐라그에 돌아온 기상학자, 지질학자 등이 포함되어 있어요. 이런 전문가들의 도움 덕분에 저희가 이번 눈사태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던 거고요.

바이스

우리가 현재 가진 능력으론 대규모의 눈사태를 막을 수 없어요. 하지만 만약 눈사태가 완전한 형태를 갖추기 전에 미리 특정 위치에 폭발을 일으킨다면, 눈사태를 보다 작은 규모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요.

바이스

그럼 결국 대규모 눈사태의 발생은 막을 수 있는 거죠.

민첩한 쉐라그 전사

너무 겸손하신 거 아닙니까, 대장.

민첩한 쉐라그 전사

처음엔 저희가 가지고 있었던 인적, 물적 자원이 눈사태를 막기엔 턱없이 부족해서, 기껏해야 경보를 내리는 게 전부였어요.

민첩한 쉐라그 전사

하지만 결국 이런 방법을 제시한 건 대장이잖아요. 모두들 이게 훌륭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고요.

바이스

난 단지 아이디어를 제공했을 뿐이야. 그 과정에서 필요한 수많은 계산은 소대의 전문가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고.

연로한 귀족

대규모 눈사태를 방지한다고?

바이스

네, 지금 보고 계신 게 바로 눈사태를 막아내는 방어선입니다.

바이스

아마 나중에는 더 견고하게 만들 수도 있겠죠.

바이스

그때가 되면, 모두가 지금 아저씨가 서 계신 바로 이 자리에서 신의 '뒤척임'을 두 눈으로 직접 관찰할 수 있을 겁니다.

바이스

지금 아저씨께선 운좋게도 처음으로 특등석에 앉을 기회를 얻으신 거예요.



바이스

저길 보세요, 시작하네요.

처음엔 산등성이에 쌓여 있던 눈들이 순간적으로 흔들리면서 흘러내릴 뿐이었다. 그러나 그 눈들이 흘러내리는 것을 시작으로, 곧 우웅거리는 울림소리가 온 산골짜기를 맴돌기 시작했다.

그 조그마한 눈의 흐름은 이어서 눈 깜짝할 사이에 난폭해지더니, 굉음을 내며 마치 무형의 힘이 작용한 듯 이내 눈의 파도가 되었다. 이 눈의 파도에 의해 나무는 뿌리까지 뽑혔고, 거대한 암석마저도 남김없이 집어삼켜 졌다.

눈사태의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라서, 마치 온 산이 순식간에 땅 밑으로 가라앉는 듯했다. 눈과 얼음이 교차하며, 웅장하고도 공포스러운 광경을 자아내었다.

과거라면 모든 쉐라그인이 소문을 듣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지고, 직접 목격한 이들은 혼비백산하며 달아났을 법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산 아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강철의 성벽을 믿고 자신에 가득 찬 눈빛으로 눈사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이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자연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었다.


눈과 얼음으로 이루어진 급류가 격렬하게 내달리며 트럭으로 지어진 방어선에 부딪혀 왔다.

자연의 힘 앞에선 인간보다 수천 배는 더 무거운 트럭조차 미약한 존재에 불과했다. 눈의 파도가 강철의 성벽을 계속해서 밀어붙혔고, 트럭 몇 대는 넘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인간의 지혜가 빛을 보고야 말았다.

강철의 방어선이 계속해서 뒤로 밀려나긴 했지만, 눈의 파도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그 힘을 잃어간 것이다.

방어선이 밀려나는 속도가 점차 느려지더니, 마지막에는 한 대의 트럭이 바이스와 노인으로부터 불과 십여 미터에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미리 터져버린 눈사태는…… 그렇게 힘을 모두 잃고 멈췄다.


바이스

앞으로 이 방어선은 곧 건설될 철도의 노선을 통해 최단 시간 내에 쉐라그의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도록 만들어질 거예요.

바이스

과거 이 '쉐라간드의 뒤척임'은 모든 쉐라그인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삶의 터전을 잃었죠.

바이스

하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쉐라그인들은 지금 아저씨처럼 이렇게 앉아서 방어선에 의해 저지되는 눈사태를 내려다보고 있을 거예요.

바이스

과거엔 이런 일을 상상이나 해 보셨나요?

연로한 귀족

……

바이스

아뇨, 상상도 못하셨겠죠.

바이스

저도 못했거든요.

바이스

하지만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노인의 목도리는 이미 바람에 날아간 지 오래였고 그의 머리카락 또한 눈과 얼음에 뒤덮여 버렸으나, 그 이외에 다친 곳은 하나도 없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바이스의 두 손은 계속해서 노인의 두 어깨를 짓누르고 있어 노인에게 도망칠 틈 하나 주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노인이 조금이라도 냉정함을 찾고 고개를 살짝만 돌렸더라면, 바이스가 매 순간 온 신경을 노인이 아닌 다른 곳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쉽게 눈치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지휘 아래 만들어진 강철의 방어선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고, 노인의 어깨에 가해진 힘이 그가 흥분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바이스

데겐블레허 누님?!

바이스

지금 주민 분들의 대피를 돕고 계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바이스

대체 왜 산에서……

바이스

잠깐, 지금 등에 메고 계신 그 두 사람은 혹시……?!

데겐블레허

한 쌍의 부부가 아직 대피하지 못했다고 하길래, 바로 찾으러 갔다.

데겐블레허

아직 살아 있다.

바이스

……!

바이스

어서 이 두 분을 치료해 드려.

민첩한 쉐라그 전사

네!

바이스

정말…… 감사드립니다, 데겐블레허 누님.

데겐블레허

확실히 눈사태는 흥미롭군.

데겐블레허

난 먼저 돌아가지, 다음에도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불러라.

바이스

네.

연로한 귀족

저 여자…… 혼자서 저 눈사태에 뛰어든 건가?!

바이스

……솔직히 제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네요.

바이스

그래도 이 정도면 이제 깨달으셨겠죠.

바이스

이 외부인들은 쉐라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무언가를 갖고 있고, 때문에 아저씨의 머리 위에 설 수 있다는 것을요.

바이스

부디 잘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에드윈 아저씨.

바이스

아저씨와 아저씨를 따르는 분들은 이 흐름에 그저 휩쓸려만 가실 건가요, 아니면……

바이스

함께 이 위에 앉아서 과거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마저 지배하실 건가요?

연로한 귀족

……

연로한 귀족

아직 우리에게 함께할 기회가 남아 있느냐?

바이스

물론이죠.

바이스

주인님께선 새로운 쉐라그를 함께 만들어 갈 분들을 언제나 환영하신답니다.

노인은 잠시 침묵하더니,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연로한 귀족

아무래도 내가 정말 늙은 모양이야.

바이스

아직이에요, 쉐라그는 아직 아저씨를 필요로 해요.

연로한 귀족

……하. 돌아가서 생각 좀 해 보마. 사람들이랑 얘기도 좀 해 봐야겠어.

바이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바이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수천 번은 더 보았을 바이스의 웃음. 노인은 바이스가 그 웃음을 일종의 자기방어 수단으로 사용할 때가 더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이스의 이번 웃음 만큼은 누가 보아도 진심이 담긴 웃음이었다.

그 웃음은 햇빛 아래서 더욱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