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연극
샬렘은 늘 과거에 대한 꿈을 꾼다.
수상한 하늘빛.
어두운 태양과 잿빛 구름. 먼 곳부터 갈라지기 시작한 하늘의 균열이 점차 중심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당신은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언제까지고 그날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날은 모두가 알고 있는 정해진 예언과도 같았고,
그날은 마치 벗어날 수 없는 악몽과도 같았다.
당신은 이것이 연극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남들의 눈에 비친 당신의 삶은, 그저 연극에 불과했을지도 모르지만.
침연.
자신에게 물어봐.
무대 위 배우에겐 오직 각본뿐이잖아. 그런데 당신은 어떨까?
과연 당신은 어떤 선택을 내릴까?
……
역시 전 못하겠어요.
침연, 마음 약해지지 마.
내가 우리의 계획을 망치지 않았다면 다들 죽지 않았을 텐데.
아직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남아 있으니 지금이라도 내 머리를 가지고 돌아가……
조용히 하세요! 절 후회하게 만들지 마시라고요!
……
마음이 약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장 당신의 목숨을 끊고 머리를 베어 영주님께 바친 후……
갖은 치욕을 참아가며 복수의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걸까요……
아니요, 이건 잘못됐어요.
……이걸 받으세요.
이건…… 네 비수잖아……
이걸 가지고 떠나세요.
하지만, 침연!
날 살려주고 나면 넌 어쩔 생각이지?
전……
당신은 또 한 번의 선택을 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미 잘 알고 있잖아, 그렇지?
젊은이, 며칠 동안 아이들을 돌봐줘서 고맙네.
꼬마 녀석들이 자네의 이야기가 정말 재밌다고 하더군!
별말씀을요, 어르신.
아이들이 정말 착하던걸요. 오히려 저희가 이곳에 묵는 바람에 폐를 끼쳤죠.
폐는 무슨.
아, 그럼 더 방해하지 않겠네.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마을 사람들과 잘 지낸 모양이네.
얘기만 몇 마디 했을 뿐인데요, 그렇게 힘들지 않았어요.
그것도 네가 인내심이 있었던 덕이야. 나한텐 무리야.
요 며칠 너무 평온한 것 같네. 임무도 특별할 게 없고. 왠지 적응이 안 된다니까.
평온한 게 좋죠.
개인적으로는 특별한 일이 없었으면 하는데……
네가 바라던 게 은둔 생활이잖아. 그건 나도 알아.
참, 침연.
네게 줄 선물이 있어.
선물이요? 뭐길래……
둥글고 육중한 물건이 당신 앞으로 떨어졌다.
살짝 부패한 것 같은 그것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둔탁한 소리가 났다.
'선물'은 구르고 굴러 당신의 발치에 멈췄다.
흐릿하고 탁한 눈알이 당신을 올려다보고 있다.
……
이 녀석의 무기도 함께 챙겨왔어.
원래 네 거지?
어…… 어째서……
네가 잠시 마음이 약해져 살려줬던 사람이야.
네가 과거로부터 도망쳤다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이런 형태로 나타나는 거지……
침연, 그때 그자를 죽이지 않은 건 옳은 선택이었어.
옳은…… 선택?
덕분에 연극이 한층 더 재밌어졌잖아.
왜 그래, 침연. 이게 바로 네가 극단을 위해 완성한 각본 아니야?
각본……?
아, 아니에요!
저는 이제 극단과 아무 상관이 없어요! 아주 오래전에 그곳에서 도망쳐 나왔다고요!
이건 각본이 아니에요! 각본일 리가 없잖아요?!
아니……
이건 제 선택이에요……
선택이라니?
침연, 그게 무슨 소리야?
이건…… 저만의……
……
제가 당신을 죽이지 않는 게 옳은 선택일까요?
아니.
뭘 고민하는 건진 몰라도, 날 죽이는 게 최선의 방법이야.
큰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잖아. 계획대로 행동하면……
아니!
계획 같은 건 없어요. 당신은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고요!
어서 도망쳐요! 저랑 같이!
도망칠 수 있어요. 조심만 한다면…… 잘 숨어서 잡히지만 않으면……
……
침연, 진정해.
난 도망칠 수 없어. 마지막으로 널 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
뭘 하려는 거예요?
멈춰요! 그만두세요!
네 발목을 잡을 수는 없어.
……거짓말이죠?
……
연기는 그만하고 일어나세요! 당장요!
어서 일어나라니까요! 더 이상 꾸물거릴 시간 없어요!
……
……왜 말을 하지 않는 거죠?
……
침연, 우리는 막다른 길에 다다랐어.
날 죽이고 내 머리를 가져가.
……
어이, 듣고 있는 거야?
어서 날 죽여! 시간이 없어!
당신을 죽이라고요?
이렇게 당신의 심장에 비수를 꽂고 당신이 천천히 죽어가는 모습을 보라는 건가요?
그래, 맞아. 바로 그거야.
침연, 넌 올바른 선택을 했어……
정말 그럴까요?
그런데…… 이게 정말 제 선택일까요?
선택이란 건 뭐길래?
당신이 뭐길래?
'침연'의 모든 것은 극단에서 비롯되지, 당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는 '자아'라는 게……
과연 정말 존재할까?
하…… 하하……
당신은 죽을 거예요. 당신이 죽으리란 걸 전 알고 있어요.
당신의 머리는 목과 떨어질 운명이에요. 전 그저 머리가 먼지가 있는 쪽으로 떨어지지 않길 바랄 뿐이죠.
그래서 이번엔…… 이번에는 직접 당신의 목을 벨 거예요.
그게 네 예언인가, 침연?
예언이 아니에요. 그저 본 것뿐이죠.
당신의 죽음을 봤어요. 제가 살려준다고 해도, 당신은 죽게 되죠.
저도 끝내 도망치지 못하고요.
당연히 도망칠 수 없지.
침연, 네가 아무리 잘 숨는다 한들 널 지켜보는 눈을 피할 수 없을 거야.
……누가 절 지켜보고 있다는 거죠?
그야, 관중들이지.
관중…… 관중들이라고요?
연기를 망쳤으니 절 없애려고 하는 건 알겠어요. 그런데 왜 지켜본다는 거죠?!
하긴, 누군가는 무대에서 마음 약한 연기를 하는 널 보며 분노했을 거야. 하지만 그 또한 예상했던 일이고.
알다시피 그게 바로 예술의 매력이지.
좋은 연극과 좋은 배우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하잖아, 안 그래?
아…… 아니에요! 이럴 수는 없어요!
당신을 살려주는 건 그들의 계획이 아니라 제 선택이에요!
그렇게 확신한다면서……
넌 왜 아직도 이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거지?
왜 도망쳤으면서도 그날로 계속 돌아오는 거냐.
왜 갖은 방법으로 나를 저 몸에서 떼어내 곁에 두려는 거고.
저는……
침연, 두려워하고 있구나.
날 놓아주는 게 네 유일한 저항이었겠지.
넌 극단에서 도망치느라 얼마 없던 용기마저 다 써버렸잖아.
'블러드 다이아몬드'가 찾아왔는데도 할 수 있는 건 오직 숨는 것뿐이었지.
넌 언제나 그들이 쫓아오는 것보다 이 모든 게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더 두려워했어.
넌 타인의 시선이 집중되는 걸 싫어하지. 이곳에 '진정한 자신'은 없다고 생각하니까.
안 그래?
……
입 다물어요.
당신은 제 꿈속의 악령일 뿐이에요. 애초에 이곳에 존재하지도 않잖아요!
그리고 절 침연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세요!
하하, 불쌍한 녀석. 네 두려움을 없애지 못하고, 의문도 잠재우지 못하는구나!
너도 알고 있겠지. 자아를 찾는 건 금기다……
하지만 그것으로 위대한 예술을 이뤄낼 수 있지!
여전히 예술을 위해 헌신하고 있구나! 다들 널 잘못 평가하고 있었어. 넌 아주 뛰어난 배우야!
시끄러워! 이건 연기가 아니란 말이야!
반드시 당신에게서 벗어나겠어, 그리고 죽여버리겠어!
두 번 다시 계획된 무대에 오르지 않겠어요. 전 더 이상 침연이 아닙니다. 제 모든 건 한낱 연극 따위가 아니라고요!
호오, 작은 결심을 한 모양이군.
그럼 하나만 묻지.
침연이 아니라면, 넌 누구지?
전……
저, 저는……
……렘?
샬렘?
……!
아…… 네.
죄송합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무슨 일인가요?
왜 멍하니 있는 거야?
별일은 아니고. 조금 전에 네가 누군가와 대화하는 소리가 들리길래 왔는데…… 네가 여기서 멍하니 서 있더라고.
……잘못 들으셨을 거예요. 여긴 저뿐인걸요.
다른 사람은 없었어요.
그런가? 그럼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참, ■■.
……방금 뭐라고 부르셨어요?
어? ■■이라고 했지.
왜 그래, 이게 네 코드네임이잖아?
뭐 그건 됐고, 이걸 좀 봐……
네게 줄 선물이 있어.
……
선물이요?